나는 내 꿈이 비올리스트인줄 알았다

음대에서 문예창작과로 전과한 이유

by 서유진


초등학생 때, 나의 친오빠는 첼로로 영재원을 다녔다.

엔지니어였던 우리 엄마는 거의 매일 회사에 다녔으나 오빠를 영재원에 데려다 줄 때는 회사에 가지 않고 오빠를 데려다주었는데, 나는 그게 참 질투가 났다. 그런 치기심에 엄마에게 졸랐다.


“나도 첼로 할거야!”


오빠가 하니까 나도 해야 된다는, 영락없는 어린 아이들의 논리였다. 다만 장벽이 있었으니 나는 초등학생 때 반에서 키 번호로 항상 1번을 하는 아이였고 (이거라도 1등을 하니 다행이라며 말하곤 했다. 물론 키 작은 순서지만.) 첼로는 앉아서 연주하는 악기인데, 발이 땅에 채 닫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엄마는 대신 내게 비올라를 사주었다. 이것은 내가 열세살때의 일이고 꼴랑 1년 비올라를 해서 예술학교에 간신히 들어갔다. 예술학교에는 어느 노래 가사처럼 “나는 네 살 때부터 피아노를 쳤지“하는 얘들의 공간이었다.


나는 ‘네가 부족하기 때문에 남들의 몇 배로 열심히 해야 돼!’라는 말이 싫었다. 당시 깊게 사유해본 적은 없지만 그냥 싫다고 생각했다. 다시 와 생각해보면 저 말 자체는 맞는 말이다. 얘들 사이에서 실기 성적은 바닥을 기었고,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는 아이들 사이에 껴서 무시를 당하기도 했다. 이런 일은 나의 원동력이 되기보다 포기하고 싶게 만드는 마음으로 작용했고, 나는 예고 입시를 치루지 않고 일반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고등학생 때 나는 대학에 가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해 등교하면 1교시부터 엎드려서 잠을 자는 학생이었다. 점심 시간에만 겨우 친구들이 깨워줘서 일어났던 것 같다. 쉬는 시간에도 놀자고 깨우는 친구들이 있었긴 하다. 이렇게 고등학교 1학년의 겨울이 시작될 즈음, 나는 대안학교에 가게 되었다.


대안학교에서 닮고 싶은 어른을 만났다. 나는 고등학교에서 잠만 자고 공부 못하고 게으른 학생이었는데, 이런 나를 책을 많이 읽은 것이 표가 난다며 알아봐주시고(부모님이 맞벌이라 스마트폰이 없을 시절 책은 내 친구였다.) 똑똑한 학생이라며 나를 참 많이 아껴주셨다.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3학년의 일이었다. 나는 인생에서 항상 남들보다 늦는 사람이다. 이제와서 중학교 때부터 놔버렸던 수학을 하기엔 나의 저주 받은 수리 감각을 생각했을 때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겨졌다. 아, 집에 먼지 쌓인 채로 방치해 둔 비올라가 생각났다. 음악 선생님이 되어야겠다.


결론적으로 음악교육과에는 떨어졌다. 대신 관현악과, 기악과로 넣은 대학에는 붙었다. 음대에 진학했는데 별로 기쁘지 않았다. 음악교육과에 떨어진 계획에 없던 인생은 실패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청심환을 먹든 로라제팜을 먹든 간에 남들 앞에서 연주하는 것이 두려워졌다.

내가 왜 비올라를 했는지 떠올렸다. 생각해보면 나는 분명 음악을 사랑하기는 했다. 하지만 “모든 욕망은 타인의 욕망이다.”라는 라캉의 말처럼, 그것은 어머니의 바람이었다. 나는 엄마에게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예술학교에 합격해도, 음대에 진학해도, 나는 엄마에게 자랑스러운 딸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랑스러운 딸이 되기를 포기하고 2025년 2학년 1학기에 나는 문예창작과로 전과했다.


나는 아직도 남들 앞에서 연주하는 것이 두렵다. 연주하지 못한다. 하지만 감상은 할 수 있었다. 음악은 무대 위 연주자의 것 뿐만 아니라, 감상자의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계속 클래식을 듣는다. 그리고 그걸 글로 남겨보기로 했다.



다음 편 예고:

《비올라는 왜 늘 가운데에 서 있을까 – 연주자 시점으로 본 고립의 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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