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과 카피캣에 대하여
사실 디자인을 카피한다는 게 흔히, 또 죄의식 없이 일어난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막상 당하면 얼마나 화나는 일인지 알고는 있었지만, 나는 이제 학교도 졸업했고 어리지만은 않은 나이니까. 주변에서 하루 이틀 본 것도 아니고 의연하게 대응할 수 있겠지 했다. 사진 던져주고 ‘이것처럼 해줘요’라는 말을 너무 쉽게 하는 금수 천지인 세상이란 거 모르지도 않았다. 근데 난 나를 너무 과대평가했던 모양이다.
누군가 내 작업을 도용하고 어설프게 숨겨보겠다고 선 몇 개 바꿔서 4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뿌렸다. 모교의 21학번 전원이 그 굿즈를 기쁘게 받아 들었고, 자교생이라면 언제든 받을 수 있는 다이어리 메인 커버 역시 그 거지 같은 카피본을 사용했다. 아니 나는 이런 함량 미달의 선을 쓰는 사람이 아닌데. 비록 몇년 전이었지만 내가 그린 그림은 이렇게 촌스럽지 않은데. 나 이런 폰트 쓰는 사람 아니고 나 이 정도로 못하지 않은데.
누군가는 그걸 보고 내 실력을 가늠할지도 모르겠다는 어처구니없는 상상이 나를 좀먹었다. 그렇게 지난 한 달간 나는 자주 엉망진창이 됐다. 집에서는 기분이 널을 뛰어서 독서실도 끊었고, 어떻게든 나 자신을 구제하고자 일찍 일어나 방을 치우는 습관도 들였다. 팔자에도 없는 잦은 약속에 나가서 아무렇지 않은 척 떠들고 집에 돌아왔다. 그러다가 틈이 나면 다시 화가 났다. 누군가 내 걸 도둑질한다는 건 생각보다 성가신 일이었다.
일상에 피로가 누적될 동안 도둑질을 한 학교 단체에는 여전히 각종 홍보가 하루에도 몇 개씩 올라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매일 들어갔지만 내게는 잘못을 시인했음에도 문제가 되는 도안은 버젓이 올라가 있었다. 결국 내리라고 두어 번을 통화한 끝에야 그 이미지들은 내려갔다.
미팅에 참여해 당사자를 만나보니 과후배였다. 눈물을 글썽이며 잘못이 어쩌고 한다. 센척하며 뭐라고 했지만 사실 준비해온 말의 반의 반도 못했다. 재능도, 성실함도, 양심까지도 없는 낯짝을 보고 경멸의 말을 퍼부으려고 다짐했는데. 울쌍을 짓고 자기가 부주의했다는 애 얼굴을 보니 시발 왜 내가 가해자 같은가. 상처 받은 건 온전히 나인데. 나는 잘못한 것도 없이 한 달 내내 맘졸였는데. 쟤는 왜. 바보같이도 순간 맘이 약해졌다. 하지만 아무리 삼키려 해도 ‘부주의’로 도둑질을 했다는 건 도무지 삼켜 지질 않아 말꼬리를 잡았다. 내꺼 대고 그렸다는데 부처도 아니고 이걸 어떻게 부주의로 받아들일까.
끝에는 요구했던 금액을 받기로 했고, 사과도 들었다. 이쯤이면 선방하지 않았나. 그런데 하나도 개운하지 않은건 왜일까 돈을 받아 들고 아름다운 의자를 사면 다시 기쁘게 살아가겠지 싶었는데. 마음이 무겁고 여전히 찝찝했다. 이상하게도 돈이 별로 기쁘지가 않았다.
그 친구는 자기 동료들에 둘러싸인채 회의실을 나갔다. 나는 가볍지도 않은 마음으로 1시간 반이 걸리는 거리를 돌아가야만 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먹고 긴장한채로 온 학교인데 이렇게 허망할수가. 아 한국 살기 싫다. 디자인도 정말 싫고 사람도 싫다. 집밖에선 온통 피곤한 일뿐이고 마음은 어딘가 편치않아 잠만 잔다. 내일엔 내일의 해가 뜬다는데 대체 어떤 새끼가 그랬는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