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바뀜, 숨 쉬는 일, 천국의 열쇠
얼마 전에 누군가 나에게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 물었다. 격식 없이 편안한 관계는 아닌지라 나는 쉽게 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어떤 각도에서의 삶을 말하는 것인지, 다시 말해 그가 언급한 목표라는 지향점이 직업적인 경력을 의미하는지 혹은 조금 더 넓은 범주의 사회적 자아를 말하는 것인지, 혹은 지극히 개인적 내면의 자아를 의미하는 것인지 조심스러운 역질문을 건넸다. 심오하고 난해한 질문을 무심히도 툭 던진 처음 태도 그대로, 상대방은 대수롭지 않게 어떤 범주에서의 목표라도 상관없다는 답을 내놓았다. 그리고 나는 적절한 수준의 산뜻한 답을 찾지 못해 생각이 허공을 맴돌았다. 바보처럼 우물쭈물하는 시간을 견뎌낸 다음에는 조금 화가 났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냥 이야기를 하면 되지, 굳이 상대에게 그토록 내밀하고도 어려운 질문을 던짐으로써 자기 화두를 풀어내려는 것인지, 상대에게 뿔이 났던 게다.
생각이 짧은 탓인지, 너무 긴 탓인지 나는 그러한 류의 고민에는 항시 명확한 답을 찾아본 적이 없다. 무엇이 되고 싶은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뭐 그런 것들. 언제나 내가 놓인 자리에서 내 역할을 다하려고 아등바등하는 편이지만 우습게도 오늘의 몸짓이 내일의 무엇을 위한 것인지 정확히 자각하고 있었던 적은 거의 없었던 듯하다. 그냥 두리뭉실하게 유능한 사람으로서 주어진 역할을 잘 해내면서, 동시에 가급적 올바르고 선하고 싶을 뿐. 미래의 어느 시점엔가엔 반드시 '무엇' 또는 '누군가'가 되어야겠다는 필요는 사실 크게 느껴본 적은 없다. 한 번씩 너무 쉽게 방전되어 버리는 것은 남들이 말하는, 소위 명확한 목표라는 것이 없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천국의 열쇠」(The Keys of Kingdom / A. J. 크로닌)를 꺼내 읽었다. 처음 이 책을 읽었던 건 나름의 질풍노도를 겪던 중학생 때인데, 몇 년 전 서점에서 개정번역판을 발견하고 충동적으로 구매하여 책장에 꽂아두었었다. 추억에 기대어 곧장 다시 일독하지 못한 것은 신판의 이름 표기법이 거슬린 탓이라고 하면, 핑계 치고도 너무한 것일까. 내 기억 속 주인공 '프란치스 치셤'이 신판에서는 '프랜치스 치점'이 되어 있었다. 몇 년 만에 결국 마지막 장까지 읽어낸 지금까지도 프랜치스 치점이라는 인물은 낯설게만 느껴지니, 오로지 내 마음의 평안을 위해 나는 그를 이 글에서 뿐만 아니라 영원토록 치셤 신부로 칭하고 기억함을 선언하는 바이다. (치셤이 살아 숨 쉰다 치더라도 나의 선언에 별 의미를 두지는 않겠지만.)
「천국의 열쇠」는 1900년대 중반, 스코틀랜드인 가톨릭 신부 프랜치스 치셤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이다. 소설이 나오고 몇년 뒤, 흑백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역자는 옮긴이의 말에서 이 영화를 퍽 예찬하던데, 나는 아직 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별로 그 영화를 볼 계획은 없다. 단순한 이유인데, 세기의 미남으로 칭송받은 배우 그레고리 펙이 주연을 맡았기 때문이다. 이름만 들어도 심각한 미스캐스팅이라고 생각한다. 치셤 신부의 매력과 그가 전하는 감동은 감히 말하지만, 완성된 모습에서 오지 않는다. 그것은 대체로 상당히 선하지만 완벽하지는 못한 보통 사람이 완전히 모범적인 삶을 살아내며 겪는 숱한 내적 갈등과 그럼에도 끝끝내 언제나 이상적인 선택을 해가는 그의 인간적 의지에서 나온다. 치셤 신부는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를 가진 채 이렇게도 저렇게도 생겼을 수 있겠지만, 어쨌든 조각 미남의 외형만은 절대 아니리라고 굳게 믿고 있다.
치셤 신부는 누구보다 선하고 올곧은 사람이지만 어디까지나 감정에 휘둘리는 보통 사람이며, 어딘가 모난 데도 있는 사람이다. 그의 모남은 주로 반골기질로 드러난다. 기존의 체제와 질서에 순응하면 더 편해질 수 있는 기회가 올 때마다 그는 옳다고 생각하는 쪽으로, 신념에 따라 행동하고야 만다. 주저 없는 선택만은 아니다. 잠시 양심을 조금만 접어두면 일신이 편안해질 것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당연히 그는 유혹에 휘둘리며 갈등한다. 그러나 힘겹게도 옳은 선택을 해내고야 만다. 치셤은 지역유지인 챠 씨 아들의 병을 고쳐주고, 그가 보답으로 세례를 받겠다 찾아왔을 때에 이를 받아들이면 선교활동이 쉽고 편안해지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참된 신앙의 결단이 아니라면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절한다. 금전적으로 훨씬 부유한 개신교 선교사인 피스크 부부가 파이탄에 새로 들어올 때, 그를 박해하고 지역 내 선교사로서 우위에 설 수 있는 기회 앞에서 치셤 신부는 질투와 미래에 대한 걱정에 몸서리친 끝에 결국은 피스크 박사의 친구가 되는 길을 택한다.
보통의 현실에서도 종종 그러하듯, 신념에 따른 선택이 꼭 당장의 좋은 결과로 돌아오지만은 않는다. 전염병에 맞서 헌신적으로 사람들을 돕지만 정작 친우인 탈록 박사를 잃는다. 돈으로 신앙을 사지 못해 선교성과는 늘 최하위에 머물러 그로 인해 무시와 냉대를 사기 일쑤이고, 평생에 고대하던 로마행은 커녕 말년의 작은 직위마저 위협당하고 만다. 마적에게 포로로 잡혀 생명이 위태로워진 순간까지 한때 손수 거둬 키웠던 안나의 내면에 심어둔 인간성을 믿고 호소하지만, 안나를 움직인 것은 치셤 신부의 사랑과 믿음이 아니라 피스크 박사가 몰래 건넨 50달러의 뒷돈이었다.
물론 그의 선택은 종래에는 대체적으로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 안나의 마음을 움직인 결정적 한방은 돈이었겠지만, 치셤 신부의 사랑과 믿음이 밑받침이 되어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지역유지의 손쉬운 개종을 거절하였지만, 챠 씨는 긴 시간 치셤의 한결같은 올곧음에 탄복하여 결국 치셤이 중국을 떠나기 직전 그와 같은 천국의 문으로 들어서고 싶다며 스스로 기독교인이 되기를 선택한다. 피스크 박사 부부와의 우정은 의심할 나위 없이 치셤의 인생을 풍요롭게 하였다. 치셤 신부는 누구나 탄복할 만큼 모범적이고 훌륭한 삶을 살아냈다.
이상하게 지난해에서 올해로 넘어오는 동안은 꽤나 싱숭생숭한 연말연시였다. 해가 바뀌는 것에 크게 연연하지 않은지는 벌써 한참이 되었기 때문에 단순히 나이를 한 살 더 먹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헛헛함은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이토록 방전이 되어 사는 게 덧없이 느껴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그렇게 만사가 무겁고 지치기만 했다. 치셤 신부의 이야기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 우습게도 이제 그만 흐느적거리고 다시 기운을 차려야겠다는 자각이 찾아왔다. 이 훌륭한 사람의 일대기는 10대의 질풍노도에 효과적이었던 만큼 40대의 방황에도 효과가 있는 모양이다.
안락한 이불속을 벗어나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오랜만에 바깥세상을 두 발로 걸었다. 찬 공기 속에서 숨을 쉬었다. 호흡기 가득 깊이 들이마시고, 조용히 길게 내쉬었다. 아주 시린 것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조금 뒤에는 별다른 의지 없이도 절로 발걸음이 빨라졌다. 한 30분 걸었나. 숨이 살짝 가빠진 채로 난방이 뜨끈하게 도는 실내에 들어서니, 두개골이 다 쨍하더라. 이래서 노인들이 겨울에 찬바람 맞는 것이 위험하다고 하는 거구나, 하는 본능적 깨달음 뒤로 올해는 잘 챙겨 먹고, 더 움직이고, 푹 쉬기도 하며 잘 살아봐야겠다는 뒤늦은 새해다짐을 다졌다.
그러고 보니 정말 한 해가 또 시작되었다. 오늘은 나를 어디로 이끌어갈지, 나의 선택과 의지는 얼마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을지, 그 끝에 (다층적 의미의) 천국이 있을지, 하찮은 의지와 선택이 그 열쇠가 되어줄지... 알지 못할뿐더러 확신할 수 없는 것 투성이일지라도, 적어도 숨 쉬고 있고 노력하고 있음에 만족하기 위해 또 노력을 기울여가며 새해를 살아가보려 한다. 늘 조금씩 뒤늦지만, 뭐 어때. 내가 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