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신작 영화
*사진: Unsplash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너무 심하게 웃어서 민망할 지경이었다.
씁쓸한 절망으로 만들어내는 유머라니. 그래서 더 웃긴 건가.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봤다.
영화관에 가는 자체가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다.
이미 집에서 보는 것이 더 선명한 화질을 보장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영화 내내 꼼짝 않고 어둠 속에 앉아서 영화를 보는 것이 이제는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가끔은 미국 영화관이 그립기도 하다.
시끌벅적하고 사람들끼리 대화하느라 정신없는 그런 영화관.
소리 내서 웃다가 민망해지는 영화다.
나중에 OTT로 나오면 집에서 실컷 웃으며 다시 볼 생각이다.
영화로 들어가 보자.
절망에 빠진 이로 유머를 만들어내는 건 박찬욱 감독이 단연 최고봉이다.
한계 상황에서 튀어나오는 아이러니한 웃음
웃픈 절망의 코미디라고 하자.
실직자는 돼지다.
그는 살해되고
분재용 철사로 직사각의 블록이 된다. 그리고 사과나무 아래 묻힌다.
사과나무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다.
그러니, 미래를 위해서 대량의 해고는 어쩔 수 없다.
해고 이후의 삶은 나무 아래에서 썩어 가는 것이다.
아이러니한 구원인 건가 자연의 순환이라는 건가. 웃음으로 포장된 냉혹한 풍자라고 하자.
박찬욱이 영화를 잘 만들어서인지,
아니면 요즘의 내가 감정을 생생하게 잘 느껴서인지는 구분이 안 가지만,
등장인물들의 삶은 그 감정은 선명하게 심장을 강타한다.
실직한 가장의 절박함과
그 비합리적인 사고체계와 거기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면서도
주인공은 어설프고 어처구니없는 짓들을 하고 허둥거린다.
자신의 주장조차 '붉은색의 키워드' 메모 없이는 제대로 말하지 못한다.
다른 이에게 주워들은 말들이 메아리처럼 되풀이될 뿐이다.
그의 모든 살해가 끝나고,
마지막 면접 자리에서 그는 적색펜으로 손에 쓴 단어 없이
자기주장을 대차게 해낸다. 그는 돼지를 죽임으로써 생존에서 승리했고, 그 과정에서 자기 목소리를 찾았다.
실직자들은 서로 알지 못한다.
각자의 25년의 삶을 같은 애정을 갖고 같은 고민들을 해왔으면서도
서로 마음을 나누지 못하고, 연대도 못하는 고립상태에 있다.
사회는 그들을 각자도생의 섬에 몰아넣었다.
그리고 주인공은 다른 실직자의 삶을 관찰하고 그들에게서 들은 말들을 자신의 삶에 끌고 와서 메아리친다.
너는 혼자 외치고 있던 게 아니야. 나는 들었고, 다시 돌려줄게.
이는 마치 연대의 첫 단추처럼도 보인다.
하지만 동시에, 그게 그냥 메아리에 불과하다면, 아무 변화도 못 일으킨다.
반복은 있으나 연결은 없다. 서로 만나지 못한 울림만이 계속 허공에 맴돈다.
어쩔 수 없다. 시대는 변하니 회사는 대량 해고를 한다.
어쩔 수 없다. 평생을 해 온 일이 종이를 만드는 것이니 다른 일을 할 수는 없다.
어쩔 수 없다. 자리는 하나이니 다른 이들을 모두 죽일 수밖에.
어쩔 수 없다. 범죄라도 살인이라도 여자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거짓을 말해야 한다.
어쩔 수 없다: 시대가 바뀌니 대량 해고는 필수다.
어쩔 수 없다: 평생 해온 일은 전환 불가, 재교육은 사치다.
어쩔 수 없다: 자리 하나에 목숨을 건다, 경쟁은 곧 살육이다.
어쩔 수 없다: ‘여자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모든 비도덕을 정당화한다.
그 과정에서 이병헌의 연기는 늘 그렇지만 진짜 깊은 절망을 품고 있는 웃음을 잘 보여준다.
진짜 비극 속에서 터지는 웃음.
아.. 인간이란 게 참 이렇게 밖에 살지 못하는구나.
블랙코미디라기보다는 실존적 코미디가 되어버렸다.
실직한 가장의 마음이 어떠한지 느껴본 이들이 맛보는 그런 웃음과 절망의 폭탄주이다.
단독주택에서 더 바랄 나위 없는 중산층의 삶
그건 바로 깨어질 수 있다.
그러니까,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그 삶은
지속될 거라는 희망은 있으나
그 모든 것은 다 환상이라는 걸 알게 된다.
안정의 표상인 내 집과
정상성의 표상인 가족
사회적 안전망의 표상인 중산층
그 모든 것은 깨질 수밖에 없는 허상이며
그걸 지키기 위해 주인공은 살인을 하고, 그 아내는 브라를 벗는다.
더 바랄 나위 없는 삶이라고 말하는 순간, 바로 그게 가장 위태로운 지점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게 사실인 것을 깨닫는다면 권총으로 모두 다 쏴버리고 죽어버리고 싶겠지만,
그게 사실이다.
영화를 보고 우리는 삶의 베일을 벗겨낸다.
주인공은 잃은 것을 다시 복구하는 과정을 거쳐
다시 자리를 얻는다.
그러나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물리적인 것들은 모두 같으나,
사실 다시 복구한 삶은 과거처럼 환상도 희망도 아니다.
상실을 경험한 주체의 내면은 바뀌어버렸다.
겉으로는 비슷해 보여도, 거기에는 더 이상 환상이나 희망의 덧칠이 없고, 오히려 '아, 이게 언제든 다시 깨질 수 있다.'라는 자각이 따라붙는다.
절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현실감각이기도 하다.
회사에서는 뱀을 보내고, 주인공은 뱀에 물리고, 결국은 자신의 상황을 깨닫게 된다.
회사가 보내는 뱀은 너의 안전을 언제든 무너뜨릴 수 있다는 폭력적 권력을 의미한다.
뱀에 물리는 순간,
주인공은 내가 생각하던 안정, 희망은 모두 다 허상이었구나 하고 상황을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아내에게 윤활유를 뿌려주고 춤을 춘다.
자신이 비록 사회에서 일자리를 잃었어도,
그때에도 가장은 변함없이 가족을 챙기고 끌고 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나머지 부분들에서도 자리를 잃게 된다.
분재는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박찬욱이 만들어낸 하나의 연극 무대 같다.
통제된 자연과 통제된 인간, 환상 속 안전과 미학
분재의 아름다움은 사실 고통스러운 절단과 제약의 결과물이다.
돼지의 살해와 사과나무의 비료로 순환되는 것을 보여주었다. 분재는 그 자연스러운 순환을 왜곡한 생명으로 보여줄 수 있다. 자연스럽게 자라야 할 생명을 인간 욕망으로 비틀어놓은 결과물.
그리고 그 분재로 만든 무대 위에 아들이 앉아있다.
이는 한 세대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그리고 그의 아들로 이어지는 삶의 고통에 대한 이야기이다.
주인공은 아버지의 월남전에 대한 이야기를 아들에게 들려준다.
생존을 위해 사람을 죽이고 그의 손에 꽉 쥐어진 권총을 가져왔다고.
그러니, 도둑질을 한 아들에게 말한다.
그건 네가 거짓을 말하는 게 아니라고. 생존을 위해 여자들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사실, 사회의 원칙과 규범은
생존을 위해서는 다 무시해도 되는 것이라고.
그 속에서 아들은 안전하다.
주인공은 결국 집을 지킨다.
흉가나 다름없는 그 집을 주인공은 하나하나 손길을 주고 고쳐왔다.
그리고, 그 집은 마치 하나의 등장인물 같은 무게감이 있다.
그 집을 지키기 위해
가족들 각자는 더러운 짓들을 한다. 그리고 그것을 가족들은 공유하고 있다.
비록 드러내고 말을 하진 않아도.
그게 진짜 웃기는 대목이다.
웃기지 않은가 이렇게 살아가는 자체가.
그러니, 사실 박찬욱의 영화를 보고 웃었다기보다는
현생의 삶 자체가 다 블랙코미디임을 깨닫게 되어서 웃었다.
어쩔 수가 없다에서 만든 향은 상당히 고급이다.
이 영화의 패키지 팝콘을 사면, 향을 같이 준다.
향에 불을 피운다.
집안 가득 환상을 걷고 현실을 직시하라고 속삭이는 것 같다.
웃음은 환상을 태우고 남은 건 씁쓸한 연기뿐
사족
영화를 보고 나서의 씁쓸함은 영화가 좋지 못해서 느껴지는 감각은 아닌 것 같다.
실직이라는 계기가 없어도
이미 사회 구조 자체가 사람들을 서로 돼지로 보게 만들고
밟아야 내가 산다고 믿게 만든다.
학교에서도 회사에서도 심지어 가족 안에서도 '자리 하나'를 두고 경쟁하게 만들고,
같은 처지의 사람들은 서로 연대하지 못하게 구조적으로 쪼개 버린다.
결국 모두가 같은 불안 속에 있는데, 타인을 적으로 규정하고
나도 모르게 저 사람만 없어지면 내가 좀 더 안전해질 거야하고 믿어버린다.
비합리적인 사고임에도 그 자리에서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 내면에서 목격한 적 있는 감정을 들킨 듯한 불편함이 살아있다.
그걸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영화이다.
실직자는 돼지다.
아니, 사실 우리 모두 돼지다.
첼로 연주
그래도 하나의 희망은 있다.
딸은 아버지와 대화를 하지 않는다.
딸의 말은 아버지의 말을 단순히 따라하는 메아리다.
딸은 첼로 연주도 들려주지 않는다.
영화 후반부에,
딸은 직접 그림으로 악보를 창작한다. 그리고, 첼로 연주를 한다.
아버지 세대의 폭력과 합리화를 그대로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 세대의 목소리를 창조적 언어로 풀어낸다.
아버지는 붉은 키워드 메모 없이는 자기 주장을 하지 못하고, 말은 전부 구조 속 메아리에 불과했다.
딸은 말 대신 그림과 음악으로 표현한다. 언어가 붙잡지 못하는 영역, 말 이전의 내면의 울림을 건드린다.
사회적 폭력이나 언어적 기만을 뛰어넘어, 순수한 감각과 정서의 울림으로 저항한다.
아버지는 비틀리고 잘려나간 분재같은 삶을 만들어가지만, 딸은 새로운 가지를 내는 존재로 그려진다.
절망 끝에서 피어나는 미약하지만 진짜 목소리, 그러니 아주 작은 희망의 전조 정도라고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