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은 진리를 증명하지 못하지만, 실패를 인정할 때 비로소 윤리는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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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뒤렌마트의 『정의의 실행(Der Richter und sein Henker)』을 읽고
정의의 실행 줄거리
이 책은 정의를 위해 살인을 설계한 노(老)형사 베를라흐(Bärlach) 의 냉정한 실험극을 다룬 소설이다. 그는 평생 쫓아온 범죄자 가스만(Gastmann) 의 죄를 법으로는 입증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도 병든 몸으로 생의 끝을 바라보는 순간, “정의는 어차피 증명되지 않는 것”임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는 후배 형사 툴러를 조종해 가스만을 살해하게 만들지만, 그 이유를 끝내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는다. 그의 침묵은 단순한 복수가 아니라, 법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정의를 인간의 손으로 실행해야만 하는 비극적 인식의 표현이다. 결국 베를라흐의 행위는 “정의의 실행”이 아니라 “정의의 자기파괴”이며, 그가 이유를 숨긴 채 남긴 침묵은 — 인간이 신의 자리를 차지하려 한 순간, 정의가 더 이상 정의일 수 없게 되는 역설을 드러낸다.
정의의 문턱에서 인간을 묻다
이 소설은 범죄 스릴러이다. 그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는 법률가와 범죄자, 수사관과 피의자가 맞닥뜨리는 한 ‘실험극’이다. 바젤의 노형사 Hans Bärlach는 네덜란드계 재벌범 Gaston Gastmann을 향해 오래된 복수를 응시하며, 그 사이 벌어지는 사건은 법이 징벌해야 할 죄보다 법이 다가서지 못하는 인간의 죄책과 무력감을 파고든다. 이 작품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명료하다. “법이 잡지 못하면 정의는 누가 실행하는가?” 그 질문은 곧 수사와 재판이 아니라, 인간의 가장 내밀한 영역으로 들어간다.
우연과 필연의 균열
여러 평론들은 이 작품이 고전 탐정소설의 구조를 따르면서도 그 궤계(詭計; 고전 추리소설이 가진 전형적 규범, 예측 가능한 틀)를 비틀고 있다고 본다. 단서와 증거가 이어지지만, 결국 진실이 완벽히 증명되지는 않는다. 바르락은 가스만의 죄를 제도로 기소하지 못하고, 자신의 수하 Tschanz를 통해 비법적 판결을 유도한다. 이 과정은 ‘우연이 필연을 이긴다’는 뒤렌마트적 역설을 보여준다. 우연히 맞물린 여러 사건이 마침내 필연처럼 기능하며, 독자는 전통적 정의의 도식이 깨져버린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정의의 외피 아래 숨겨진 놀이극
김기선 등의 한국 평론은 이 재판극이 정의의 진지한 실행이라기보다는 정의라는 이름의 놀이극으로 읽힌다고 지적한다. ‘가짜 재판’(Scheinverhandlung)의 구조 속에서 노형사와 범죄자, 수하들은 역할극을 벌이고, 그 속에서 ‘누가 진짜 죄인인가’라는 질문은 흐려진다. 이 놀이 속에는 제도와 법, 권력과 책임이 마치 구경거리처럼, 또는 실험 대상처럼 등장한다. 하나의 게임처럼, 그러나 그 끝은 결국 사람의 죽음이다.
법의 한계와 인간의 오만
이 작품이 촘촘하게 던지는 또 다른 주제는 ‘법이 다루지 못하는 것’에 대한 성찰이다. 권력과 제도의 힘 앞에서 인간의 존엄은 흔들리고, 법은 무기력하다. 바르락은 자신이 법의 권위자라는 위치에서 한 걸음 물러나 스스로 정의를 집행한다. 그 선택은 정의의 실현인가, 오히려 정의의 파괴인가? 평론들은 이에 대해 ‘정의의 실행’이라는 문장이 역설적으로 변질되는 순간이라고 본다. 제도가 미치지 못하는 곳에 인간이 개입할 때, 그 폭력은 정당성이 아닌 위험성이 된다.
그로테스크한 미학 속의 실존적 공포
이 소설은 웃고 있지만 무섭고, 격조 있게 쓰였지만 섬뜩하다. 여러 비평가들이 이 텍스트를 ‘그로테스크 미학’의 대표작으로 꼽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설정은 비교적 현실적이지만, 그 안의 존재들은 정상적이지 않다. 우연이 결정으로 둔갑하고, 추리가 숙명으로 바뀌며, 법정이 무대가 되면서 각 인물은 배우가 된다. 그 속에서 독자와 등장인물 모두는 하나의 ‘미로’에 빠지고 마른 결말 앞에서 고개를 숙인다.
감상의 골자: 정의 vs 책임
이 작품을 다 읽고 나면 남는 건 영광이나 승리가 아니다. 남는 건 책임의 무거움이다. 우리가 법을 믿는 이유도, 제도를 신뢰하는 이유도 어쩌면 이 책임을 누군가에게 맡기기 위해서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뒤렌마트는 그 믿음마저 무너뜨린다. “법이 다가가지 못한 죄” 앞에서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바르락의 선택은 그 물음을 향해 던져진 비극적 답변이다.
문명은 정의로 유지되지만, 인간은 책임으로 살아간다
정의가 제도로 보장된다고 믿는 순간, 우리는 위험해진다. 왜냐하면 제도가 잡아낼 수 없는 것은 언제나 남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그 ‘남은 것’을 직시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남은 것이야말로 우리 각자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는 것을. 정의의 실행이 아니라, 책임의 수용으로서의 인간을 마주하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이 텍스트의 진짜 무게를 이해할 수 있다.
이 소설을 읽고 느끼는 그 조용한 불안이,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질문일지도 모른다.
정의는 완성될 수 없다.
인간의 손에 쥐어진 정의는 언제나 불완전하다. 베를라흐는 정의를 집행하기 위해 스스로 신의 자리를 넘본다. 하지만 그 순간, 그는 법이 아니라 '복수'의 차원에 서게 된다.
뒤렌마트는 이걸 통해 말한다.
법이 닿지 못한 정의를 인간이 대신 실행하는 순간, 정의는 이이 훼손된다.
우리는 종종 정의를 믿고 싶어 하지만, 그 정의가 실제로는 개인의 판단, 감정, 분노의 혼합물일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건 법의 한계를 인정하는 윤리적 겸손에 대한 메시지이다.
진짜 정의란 심판이 아니라 책임의 수용이다.
베를라흐의 저의의 실행은 결과적으로 정의의 자기파괴가 된다. 그의 행위는 가스만을 없앴지만, 세상에 정의를 회복하지는 못한다. 그건 정의가 실현된 사회가 아니라 정의의 '복수'가 완료된 세계이다.
뒤렌마트는 묻는다.
정의를 실행했다고 믿는 순간, 우리는 어떤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가?
이 질문의 답은 책임의 윤리이다.
진짜 정의는 타인을 처벌하는 데 있지 않고,
자신의 한계와 도덕적 책임을 자각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
법은 문명의 장치이지만, 정의는 인간의 내면에서만 완성된다.
이 소설은 법이 인간을 완전히 구원할 수 없다는 냉혹한 현실을 드러낸다.
베를라흐는 법의 허점을 꿰뚫어보지만, 그걸 보완하려 한 순간 스스로 괴물이 되어버린다.
이 내용이 말하는 경고는 바로 이런 의미이다.
문명은 법으로 유지되지만, 인간은 양심으로 살아남는다.
법은 질서를 세우지만, 양심이 없으면 그 질서는 폭력이 된다.
그렇기에 정의의 실행이라는 말은 언제나 경계의 언어이다.
그건 실행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결코 완전히 실행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정의를 실현하는 순간,
자신이 신이 될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경고이다.
정의는 인간의 손에 쥐어질 수 있는 완전한 결과가 아니다.
정의란
늘 불완전한 인간이 겸손하게 붙잡고 가야하는 긴장 상태이다.
그 불안, 그 미완의 정의감
바로 그걸 잃지 않는 것이 이 소설이 남기는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