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이 깊은 사람의 자기 검열

감정의 깊이는 문제가 아니라 구조이다.

by stephanette

*사진: Unsplash


문자를 보내다가 하나의 사실을 정확히 알게 되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단순히 '업무'라고 생각한 적 없다.

누군가를 성장시키고, 마음을 조율해 주고, 정서를 다루는 일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문자에는 많은 정서가 담기고, 감동을 나누거나 마음의 결을 읽어주는 방식이다.

전화 상담도 아무리 짧아도 한 시간 이상이 된다.

전문가들과의 연락조차 감정이 섞일 때가 많다.

같은 프로젝트를 함께 만들어가다보면 당연히 그렇게 된다.

돌보고, 배려하고, 함께 감동하는 방식으로 살아온 시간이 길었다.


당연히 다른 이들도 같은 결로 소통할 것이라고 믿어왔다.


그런데 요즘, 감정의 방식이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려다 보니

문장을 보내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게 된다.

마치 '객관적인 제삼자'가 내 안에서 생겨

내 글을 점검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자기 검열이다.


그래서 문장은 이렇게 다시 바꾼다.

1. 문장의 길이를 줄인다.

2. 감정을 삭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자 자체가 '상대의 감정을 배려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걸 깨닫고

그것 자체를 불편해할 사람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결국은 메시지를 쓰고도 보내지 않을 때가 늘어난다.


아주 가까운 사람들, 그리고 늘 하는 업무용 관계들과만 소통할 때는 몰랐던 일이다.

감정의 결이 완전히 다른 사람들을 대하려니까

그동안 사용하지 않던 감정의 근육을 쓰는 것처럼 피로감이 온다.


그러면서 분명해진 사실이 있다.

나는 감정의 깊이가 일반적인 평균보다 훨씬 깊다.

감정을 공유하면서 관계가 좋아지는 경우도 많지만,

반대로 그 깊이를 버거워하는 사람도 많다.

감정이 깊은 것과 불안정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임에도

그 둘을 혼동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래서 확실한 여러 페르소나들을 사용해 관계를 조정해 왔다.

지금은 진짜 나로 통합하는 과정에 있지만,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에게 불편하지 않고 오해받지 않을 말을 선택하려다 보니

그 자체로 피로가 쌓인다.





내가 감정을 느끼고 다루는 방식에 대해서

감정은 몸에서 느끼는 것이다.

심장이 미세하게 빨라지거나 어딘가가 조여 오는 느낌이 들거나 장이 불편해지거나

몸에서 올라오는 작은 변화 하나가

어릴 적부터 나에게는 매우 큰 흔들림이자 신호를 만들곤 했었다.

그것이 감정의 출발점이다.


상황은 감정을 바꾼다.

어디에서 누구와 있는지 어떤 역할을 요구받는지

상황의 결을 민감하게 읽는 편이다.

공기가 조금 달라지거나, 누군가의 말투가 평소와 다르면 바로 알아챈다.

눈빛이나 짧은 표정의 변화 침묵의 밀도

이런 맥락적 정보들은 내가 감정을 읽고 해석하는 과정으로 확장시키는 장치가 된다.


그리고 그 뒤에 항상 따라오는 것이 과거의 기억이다.

비슷한 경험들, 그때 나는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그 경험이 지금의 나에게 어떤 의미를 남겼는지.

나는 현재의 감정 뒤에 숨어 있는 오래된 감정들을 자연스럽게 꺼내게 된다.

그러니까 과거는 지금의 감정에 끊임없이 개입하는 구조다.

그러니 하나의 감정은 얇은 표면에서 끝나지 않고,

기억의 층을 따라 깊이 내려가며 의미를 확장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감정은 언어로 정리된다.

나는 감정을 글로 쓴다. 느끼는 그대로 솔직하게 가감 없이

그러고 나면, 감정에 이름을 붙인다.

이름이 생긴 감정은 자연스럽게 소화가 된다.

글을 쓰는 것은 이 과정에서 당연하게 흘러가는 연장이다.

어떤 감정이든 단어를 붙이고 서사를 만들면

그 감정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이해할 수 있는 구조물로 바뀐다.

이 능력은 과하다고 느껴질 만큼 치밀하지만,

나에게는 삶을 이해하는 방식이자 생존 방식이다.


'글쓰기'는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상당히 명료하게 정리하는 역할을 한다.

당시에는 알지 못했던 것들이

글쓰기로 쌓이다 보면,

패턴과 구조가 눈에 보이게 된다.

나는 그런 것들을 매우 애정한다.


감정을 다루는 과정은

몸 - 상황 - 기억 - 해석이 함께 움직인다.

그러니, 감정은 나에게 순간의 어떤 반응이 되지 못한다.

감정 하나는 그 뒤에 이어지는 일련의 연결고리들까지 함께 느끼게 된다.

신체적 감각, 순간의 공기, 오래된 기억, 의미의 언어화

이 과정이 합쳐지면서 감정은 단일한 느낌이 아니라

여러 층이 겹쳐진 다층 구조로 나타난다.




나는 내가 감정을 다루는 방식을 정확히 알고 있다.

감정을 깊게 느끼는 것은 나의 결함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 방식 덕분에 나는 살아왔다.


요즘 강해지는 '자기 검열'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1. '감정을 충분히 표현하는 그저 자연스러운 나'로 살아도 되는 걸까?

2. 새로운 '깊은' 인간관계를 다 포기해야 하는 걸까?

3. 침묵으로 지내야 하는 걸까?


이런 생각은 극단적인 것 같으나 그 사이에 있는 다양한 스펙트럼들을 다 생각해보고 있다.

얕고 느슨한 관계들만 하고 살아도 별 상관은 없다.

감정을 나눌 이들은 지금도 충분히 많다.

새로운 사람들과는 가능성을 닫아버리고 피상적 관계로만 지내면 되는 걸까?


자기 검열이 강해진 이유는

내 방식이 누구에게는 맞고 누구에게는 맞지 않다는 걸 정확하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미성숙한 이들은 '나라는 사람의 깊이와 감정의 표현'을 불편함, 두려움 혹은 더 나아가 공격이라고 느낀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깊은 감정을 휙 던져놓고 도망치는 이들이 있다.

주는 것은 무의식적 누수만 되고, 받는 것은 화를 내는 사람.

상대의 다가오는 거리에 따라 거리를 조절하는 나에게는 상당히 곤란스러운 일이었다.


감정을 열 사람을 제대로 고르는 일

그리고

열지 않을 사람에게는 침묵 혹은 얕은 레이어로 대응하는 일


그 구분이

성숙이자 지혜이다. 그리고 최근의 나의 화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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