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정해진 거라면,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사주와 법정 사이: 운명론 사회가 자유의지를 쓰는 방법

by stephanette

*사진: Unsplash


- 운명 VS 알고리즘, 당신의 미래는, 김대식 카이스트 뇌과학 교수, 인도철학 강용성 교수 토론을 듣고

개인적으로 매우 존경하는 두 분의 교수님이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매우 인상적인 영상이다.

각각의 교수님 강연들은 뇌과학과 인공지능 그리고 우파니샤드, 인도 종교를 주제로 했었다.

두 분이 만났으니 상당히 흥미진진한데 마침 소울메이트가 다시 추천을 해줬다.

운명 이야기를 들으면 늘 마음 한쪽이 간지럽다.
사주를 보고, 별자리를 읽고, 트랜싯을 계산하면서도, 나는 동시에 법의 언어와 함께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본 한 토론에서, 뇌과학자와 인도철학자가 나란히 앉아 이런 이야기를 했다.
“운명이 정해져 있느냐는 질문의 핵심은, 인간이 얼마나 자유로운 존재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그 말 이후로, 내 안의 두 세계가 동시에 깨어났다.
운명론과 자유의지, 그리고 “책임”이라는 단어.
우파니샤드, 사주명리학, 법학이 한 책상 위에 나란히 놓이는, 내 일상의 진짜 풍경이 떠올랐다.


1. 운명은 ‘있다’고 할 수도, ‘없다’고 할 수도 없다

뇌과학자는 먼저 아주 단순한 수준의 운명부터 짚는다.
우리는 자연 법칙이라는 운명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시간은 앞으로만 흐르고, 떨어진 물건은 아래로 떨어진다.
이 레벨의 운명은, 믿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조건”이다.


여기에 생물학적 운명이 겹쳐진다.
배가 몹시 고픈 사람 앞에 케이크 한 조각을 두면,
그가 그것을 먹을 확률은 거의 100%에 가깝다.
유전자와 뇌의 회로가 정해놓은 반응의 패턴.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은 100% 결정되어 있다”고 말하는 순간,
다른 질문들이 줄줄이 따라온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누군가에게 “넌 그렇게 하면 안 됐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왜 어떤 선택에는 책임을 묻고, 어떤 선택에는 그러지 않는가?


뇌과학자의 말은 차갑지만 솔직했다.

“인간의 뇌가 가진 가장 큰 착시는, 내가 자유롭다는 착시다.
하지만 그 착시를 믿는 순간, 우리는 실제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다.”

정말 자유로운지 증명할 수는 없지만,
“나는 선택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다른 길을 상상한다.
운명과 자유의지는,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인지 전략에 가깝다.


2. 법은 ‘자유의지’를 전제로 만들어진 언어다

운명과 자유의지의 논쟁이 가장 냉정하게 다뤄지는 곳은, 사실 종교도 철학도 아니다. 법정이다.

뇌과학자는 음주운전 예시를 들었다.
어떤 사람이 술을 마시고 운전을 해서 사람을 죽게 만들었다고 하자.
만약 모든 것이 우주가 처음 생기던 순간부터 완벽하게 결정된 것이라면,
그에게 형사 책임을 묻는 일은 이상해진다.
“어차피 그렇게 할 수밖에 없던 존재”였다면, 그의 잘못이라 부를 수 있을까?


법은 여기서 아주 현실적인 선을 긋는다.

-몇 달 전부터 계획하고 차를 범죄 도구로 사용한 경우

-우연한 악조건에서 방심으로 사고를 낸 경우

결과는 똑같이 “사람이 죽었다”이지만,
누가 봐도 이 둘은 같은 형량을 받으면 안 된다고 느낀다.


그 차이는 어디서 오는가?
법의 언어로 번역하면 이렇다.

“그 사람이 그 순간 다른 선택을 할 자유,
다른 행동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는가?”


자유의지는 여기서,
“완전한 자유”가 아니라
책임을 물을 수 있을 만큼의 자유로 정의된다.

결국 법은 이렇게 말하는 셈이다.

인간은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그렇다고 완전히 결정되어 있다고 할 수도 없다.

책임을 구분할 수 있을 만큼의 자유를 전제로, 우리는 벌을 나눈다.


운명 논쟁은 철학의 언어로 들리지만,
현실에서는 결국 “어디까지 책임을 물을 것인가”의 문제로 내려온다.


3. 점집과 법정: 한국 사회가 운명과 자유를 동시에 쓰는 방식

재미있는 장면은 따로 있다.
두 교수의 토론에서 이런 질문이 나왔다.

“점집에 가는 사람들은 운명을 믿을까, 안 믿을까?”


사람들은 운명을 믿기 때문에 점집에 간다.
하지만 정말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고 믿는다면,
점쟁이가 알려주는 말은 아무 의미가 없어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점괘는 이렇게 말한다.

“3년만 더 참으세요, 그 뒤에 풀립니다.”

“지금은 움직일 때가 아니고, 이 시기를 넘기면 괜찮습니다.”

거의 아무도 “당장 이혼해라, 아니면 인생이 망한다” 같은 말을 하지 않는다.
이 말을 사회학적으로 보면, 점집은
위태로운 선택을 유예시키는 역할을 한다.
잠시 멈추게 하고, 조금 더 기다리게 만들고,
극단적인 행동 대신 “조금 더 견딜 것”을 제안한다.


흥미로운 건 여기다.
우리는 한쪽에서는

“사주팔자가 정해져 있다”

를 믿으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그래도 네가 그렇게 선택했잖아, 책임은 네 몫이야”

라고 말한다.

논리적으로 보면 이 둘은 서로를 부정하는 문장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아무 문제 없이 두 체계를 동시에 사용한다.

불안할 때는 운명론을 불러와서 버틸 힘을 만들고,

책임을 물어야 할 때는 자유의지를 호출해서 죗값을 묻는다.

뇌과학자의 표현대로라면,
인간의 뇌는 “진실”을 찾는 기관이 아니라
생존에 유리한 해석을 고르는 기관이다.

예측이 중요해지는 순간에는
“저 사람은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행동할 것이다”라는 운명 모델을 쓰고,
법과 윤리를 세워야 할 순간에는
“그래도 너는 다르게 행동할 수도 있었어”라는 자유의지 모델로 전환한다.


운명 vs 자유의지는,
우리가 상황에 따라 갈아 끼우는 두 개의 운영체제에 가깝다.


4. 사주와 점성술은 나에게 무엇을 해왔는가

나는 사주와 점성술을 “100% 맞는 예언 시스템”이라고 믿지 않는다.
하지만 이 언어가 나를 도와준 순간들은 분명히 있다.


어떤 대운의 시작에서,
어떤 별의 트랜싯과 맞물린 해에,
나는 실제로 큰 사건을 겪었고 삶의 방향을 바꾸었다.


그때 내가 느꼈던 건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는 체념이 아니라,
오히려 이런 종류의 감각이었다.

“어쩌면 지금이,
도망치는 대신 직면해야 하는 시기일지도 몰라.”


운명은 그때, 나를 대신 결정해주는 손이 아니라
“지금 이 질문을 던져야 할 때”라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내가 우파니샤드, 사주와 점성술을 계속 공부하고,
법의 언어와 함께 놓고 비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쪽 언어는 “당신은 이렇게 태어났습니다”라고 말하고,
다른 쪽 언어는 “그래도 당신이 그렇게 선택했으니 책임지세요”라고 말한다.
나는 이 두 문장 사이의 흔들림 위에,
내 글과 선택과 싸움을 올려놓고 살아간다.


5. 자유의지 논쟁은 결국, “당신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의 문제다

운명이 정해져 있는지,
자유의지가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아마 이 글을 다 쓰고도 결론낼 수 없을 것이다.


다만 분명해지는 것은 하나다.

법은 우리가 전적으로 운명론자가 되는 순간 무너진다.


하지만 완전히 자유의지론자가 되는 순간,
우리는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 떨어진다.
“모든 것은 네 탓”이라는 잔인한 문장만 남는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이 어딘가에 서서,
상황에 따라 말들을 바꿔가며 살아간다.

어떤 날은 “이건 내 선택이었어”라고 말하고,

어떤 날은 “이쯤이면 운명이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라고 중얼거린다.


법은 그 사이에서
“책임을 묻기 위해 필요할 만큼의 자유”를 전제로 삼고,
사주와 점성술은
“버텨내기 위해 필요할 만큼의 운명”을 건네준다.


나는 그 둘 사이를 오가며 산다.

운명이라 부르든, 알고리즘이라 부르든, 카르마라 부르든,
어쩌면 중요한 건 이 질문 자체일지도 모른다.

“당신이 그때 할 수 있었던 다른 선택은 무엇이었나요?”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오늘의 나는,
이 두 질문 사이에서 겨우 균형을 잡으며 글을 쓰고 있다.


운명이 정해져 있는지보다,
그 질문이 나를 어떻게 움직이는지가
내게는 훨씬 더 중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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