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자신처럼 타자처럼, 폴 리쾨르 도덕 철학의 심장부
*사진: Unsplash
윤리는 흔히 의도의 문제로 오해된다.
우리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가장 먼저 묻는다. 무엇을 의도했는가, 어떤 마음이었는가, 고의는 있었는가. 그러나 이러한 질문은 윤리의 핵심에 도달하지 못한다. 폴 리쾨르의 『자기 자신처럼 타자처럼』은 이 통념을 근본에서부터 해체한다. 이 책에서 윤리는 감정이나 의도가 아니라, 행위 이후 타자의 삶에 남은 구조적 변화에서 발생한다.
리쾨르의 질문은 회피하기 어렵다.
이후, 타자의 삶은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지속될 수 있었는가.
사건은 단일 행위가 아니라 구조다
윤리적 분석에서 사건을 하나의 행위로 축소하는 순간, 책임은 가벼워진다. 한 번의 말, 한 번의 실수, 한 번의 오해로 사건을 환원하면, 설명과 해명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리쾨르의 윤리는 사건을 그렇게 보지 않는다.
그에게 사건은 반복되는 선택, 지속된 침묵, 유예된 결정,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작동하는 관계 구조의 총합이다. 특히 권력의 비대칭이 존재하는 관계에서, 명확히 말하지 않음과 멈추지 않음은 중립이 아니라 적극적인 행위로 기능한다. 윤리는 무엇을 했는가보다, 어떤 상태를 계속 가능하게 했는가를 묻는다.
의도 윤리의 한계
사건 이후 가장 자주 호출되는 언어는 의도의 언어다.
오해였다는 말, 그런 의도는 아니었다는 설명, 감정적으로 복잡했다는 진술은 모두 행위 이전의 내면 상태를 소환한다. 그러나 리쾨르는 의도를 윤리의 중심에서 제거한다. 의도는 설명이 될 수는 있지만, 면책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윤리의 질문은 내면을 향하지 않는다. 윤리는 세계를 향한다.
그 의도가 세계에 번역된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그 결과로 타자의 삶이 어떤 조건 위에서 재구성되었는지를 묻지 않는 한, 윤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흔적은 감정이 아니라 삶의 조건 변화다
리쾨르가 말하는 흔적은 심리적 상처나 기억의 강도가 아니다. 흔적이란 타자의 삶에서 선택 가능성이 변형된 지점을 의미한다. 이전에는 가능했던 말이 이제는 위험해지고, 이전에는 안전했던 공간이 불안의 장소로 전환되며, 이전에는 자연스러웠던 판단이 자기 검열을 거치게 되는 변화. 이것이 윤리적으로 의미 있는 흔적이다.
이 변화는 반드시 고통의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다. 오히려 흔적은 일상의 미세한 조정 속에서 드러난다. 조심스러워진 말투, 축소된 기대, 늘어난 경계,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긴장. 윤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비행동 또한 행위다
리쾨르 윤리의 결정적 전환 중 하나는 비행동의 윤리적 지위를 명확히 설정한 데 있다. 결정하지 않음, 기다림, 애매함의 유지, 책임을 다음으로 미루는 태도는 모두 윤리적 효과를 생산한다. 이는 단순한 소극성이 아니라, 타자의 삶에 특정한 부담을 전가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때 타자는 불확실성을 감당해야 하는 삶에 놓이고, 관계의 위험을 스스로 관리해야 하며, 경계 설정의 책임을 홀로 떠안게 된다. 이러한 조건 변화는 명백한 흔적이며, 윤리적 분석의 대상이다.
책임은 사후적으로 발생하며 철회되지 않는다
리쾨르에게 책임이 잔혹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것이 사후적으로 발생하고, 철회되지 않기 때문이다. 책임은 미리 계약되지 않고, 의도로 통제되지 않으며, 시간의 경과로 소멸되지 않는다. 행위 이후, 타자의 삶에 남은 구조 변화가 존재하는 한, 책임은 계속해서 현재형으로 작동한다.
따라서 사과, 해명, 설명은 윤리를 종결시키지 못한다. 그것들은 윤리의 시작점이 될 수는 있지만, 종착점이 될 수는 없다.
‘가해자가 아니다’라는 말의 윤리적 무효성
리쾨르 윤리에서 가해 의도와 책임 주체는 동일하지 않다. 가해 의도가 없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타자의 삶에 남은 변형을 제거하지는 않는다. 윤리는 도덕적 자기 이미지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발생한 결과에 대한 응답 가능성의 문제다.
이 지점에서 “나는 가해자가 아니다”라는 말은 윤리적 언어로 기능하지 않는다. 그것은 행위의 결과를 의도의 영역으로 되돌려, 책임을 무력화하는 장치일 뿐이다.
윤리는 사후 평가가 아니라 현재의 위치 조정이다
타자의 삶에 남긴 흔적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과거를 심판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사후 평가의 자리가 아니라, 그 흔적이 여전히 작동하는 세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다시 묻는 일이다. 윤리는 과거를 닫는 행위가 아니라, 현재를 다시 배치하는 태도다.
흔적을 인정한다는 것은, 그 이후에도 여전히 아무 일도 없었다는 자리에 서지 않는다는 뜻이다. 윤리는 바로 그 자리 이동에서 발생한다.
결론
『자기 자신처럼 타자처럼』이 요구하는 윤리는 선해지라는 요청이 아니다. 이 책은 우리에게 착한 사람이 되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묻는다. 당신의 행위 이후, 타자의 삶은 어떤 조건 위에서 계속되었는가.
윤리는 감정의 순결이 아니라, 흔적 앞에서 물러서지 않는 태도다. 그리고 그 태도는 언제나 현재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