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

오후가 반짝하고 저물었다.

by stephanette

섬세한 짙은 잿빛의 레이스 스커트를

얇은 비닐 커버 속에서 꺼낸다.

스커트도 그 비닐 커버처럼 투명하다.

살색 안감은 시선을 왜곡한다.


짙은 브라운 블라우스의

키만큼이나 기다란 리본을

가슴 앞에 단정하게 묶는다.

스커트만큼이나 얇은 패브릭이 몸을 감싼다.


옅은 하늘색의 광목 옷커버 속에

정갈하게 걸어서 보관하던

블랙 버버리의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간다.

거의 일 년 만인가.

몸에 걸치니 옅은 황갈색의 체크무늬가 슬쩍 흔들린다.


신발장 가장 높은 곳에 올려두었던

높은 하이힐을 꺼내 신고

반짝이는 크리스털들이 제자리를 잡도록 매만진다.


거울에 비친

성장을 한 나의 모습이 약간 낯설다.


과속 카메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리 급할 것 없는 길을 질주한다.

밟는 만큼 튀어나가는 자동차

한강의 낮은 그다지 별 것 없는 잿빛이다.


18도에 맞춰진 실내온도가

그리 차갑지 않다.

어느새인가 따뜻해졌는지

체온이 올라가서인지 구분은 되지 않는다.

볼에 손을 대지 않아도 붉게 물들어 있다.


커다란 빌딩들 사이에

조용한 건물로 들어간다.

예약된 자리에는

테이블 세팅이 모두 되어 있다.

약속된 분이 오기를 기다린다.

인기척도 없는 조용한 실내가

대화로 채워진다.

시간은 어떻게 흘렀는지도 모르게 지나간다.

2차, 3차 한 번 시작된 만남은 계속 이어진다.

자질구레한 일상부터 깊은 이야기들까지.


아무런 의도도 없는 만남으로 인해

오후가 반짝하고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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