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여의 잉여, 하릴 없이 산책하는 것이 좋다.
글쓰기는 잉여의 잉여다.
삶의 본질적인 부분이라 생각한다.
사적인 글쓰기는 한 적이 거의 없다. 해봤자 최근 일년 남짓.
주로 보고서를 썼다. 그것도 별 의미가 없기는 매한가지다. 시즌이 되면 제출해야 하니까 하는 것이다.
하다보면, 상한선을 넘는다. 어쩔 수 없다.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한다. 그러다보면 일이 늘어난다. 그래서 일에 쌓여서 살았다. 일은 하다보면 가속이 붙어서 스스로 멈춰지지 않는다. 가속이 붙은 일은 일 자체가 비효율이라는 생각마저 잊게 한다. 일에 올라타서 미칠듯한 속력을 즐기는 일은 흥분된다. 과속고지서는 자주 날아왔다. "내가 언제?"라고 생각하지만, 뭐 곰곰히 따져보면 과속을 즐기긴 했다. "어쩔 수 없다."라고도 자기 합리화를 했었다. 그러나, 지나고 나면 알게 된다. "어쩔 수 없다."라는 건, 스스로 즐기고 있음을 외면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질주가 가능해지면, 다른 것들은 다 재미가 없다. 이미 가속의 쾌감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랫동안 잉여를 잊고 살았다. 삶의 본질에 다가가지 못하면, 궁극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한다.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사람은 연약한 존재다. 취미생활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돌아가면서 여러가지에 심취했다. 그러나 잉여의 빈 자리를 채워주지는 못했다.
의도하지 않은 이유로 인해 글쓰기를 했다. 십만명 단위가 넘는 이들이 나의 글에 열광하면 약간 광기가 생긴다. 짜릿하다. 그러나, 글자수 제약으로 브런치로 넘어왔다. 긴 글을 잘 쓰지 않는다. 이유를 잘 모르겠다. 그 이전에는 "한 단어로 말할 수 있는 것을 굳이 늘려서 할 필요가 있나?" 라고 생각했다. 알아들을 이는 알아듣는 것이고, 그게 안되면 할 수 없다고도 생각했다. 선문답 같은 말하기라고 하자. 요즘은 글을 길게 쓰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써놓은 글을 읽어보고는 "초고밀도 압축 요약본"이라는 생각을 할 때가 종종 있다. 내가 써놓고도 그 내용에 대해서 충분히 감응하기에는 정보량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거의 개조식 메모에 가깝다. 기억을 되살리기 위한 용도 정도다.
사적인 글쓰기는, 살아남기 위해서 하는 잉여의 잉여다. 나는 생존을 위해서 나 자신에게 일정 부분의 잉여를 허락하기로 했다. 다른 이유도 있다. 날카롭고 예리한 바늘처럼 정곡을 찌르는 생각이 점점 더 예리해지고 더 깊이 들어간다. 명리학에서는 현침살이라고 한다. 올해 유독 더 심하다. 사람들 앞에서 말을 조심한다. 옳은 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해도 되는 것은 더더군다나 아니다. 그래서 대신, 글로 쓴다. 써놓고도 고친다. 누군가를 찌르고 싶지는 않다. 수위 조절을 한다고는 하지만, 바늘로 찌르면 다친다. 그리고 아프다. 깊이 찔리면 오래 아프다.
나는 정곡을 찔리는 것을 좋아한다. 그게 지금의 나를 만든 힘의 60%는 되는 것 같다. 물론, 찔리면 아프다. 그러나 그런 것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애정한다. 정곡을 찌르는 사람은 매력적이다. 내가 가졌던 기존의 사고를 깨트리는 것은 나 대신 비용을 지불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 보상은 매우 크다. 다른 이를 더 이해할 수 있다. 자기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자신의 작업 혹은 일의 규모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나의 세계관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남아 있는지도 알 수 있다. 카프카의 말처럼, 얼음을 깨는 도끼 같은 글과 말을 애정한다. 그래서 그런 말을 해주는 이가 고맙다. 그렇다면, 아픈 것 쯤이야 설령 오래 아프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난, 찔리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다른 이들도 찔리는 것을 좋아한다고 자연스럽게 착각할 때가 있다.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남도 그럴 것이라고 추측하니까. 그러니까, 나의 글쓰기는 자가검열을 여러번 돌린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혹은 공개되지 않는다. 그게 답답하다.
잉여의 잉여, 하릴없이 브런치의 산책길을 걷다가.
답답한 마음에 글을 쓴다.
이 글은 누군가를 찌르기 위한 글이 아니다. 내가 나를 찌르지 않기 위해 쓰는 글이다.
글쓰기는 사실 잉여가 아니라,
과속하는 인간이 자기 속도를 감속하기 위해 만든 안전지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