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으며 쓴 책이다.
나는 미로를 만들고, 입체 퍼즐로 건축하고, 글 속에 상징과 기호를 심어두는 일을 좋아한다. 그래서 그것을 함께 발견할 사람을 원했다. 그러니 내 욕망은 연애라기보다는 공동 해독자에 더 가까웠다. 물론 지금은 둘 다 내가 한다. 만드는 것도, 해석하는 것도.
내가 꿈꾸는 이상형은 이런 말을 해주는 남자다.
“이 장면이 왜 여기 있는지 알겠네.”
“이 상징은 앞의 사건과 뒤의 사건을 이렇게 저렇게 연결하는 거 아냐”
“너 지금 쓰는 소설은 나선형 상승 구조 미로 설계를 하는거네.”
뇌색남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런 것이다. 이러면, 섹시하지 아니할 수 없다. 흐...
어쨌든. 각설하고. 들뢰즈는 이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랑도, 기억도, 예술도 결국 기호를 해독하는 과정이다.
들뢰즈에게 프루스트의 세계는 기호를 배우는 이야기다. 인간은 어떤 사람, 사물, 장소, 말투, 표정, 냄새, 몸짓을 만나고 거기서 알 수 없는 신호를 받는다. 그 신호가 우리를 흔든다. 우리는 그 의미를 알기 위해 해석하고, 오해하고, 질투하고, 고통받고, 다시 쓴다.
인간은 진실을 스스로 깨닫는 것이 아니라, 어떤 기호에 얻어맞고 나서야 배운다.
이 책에서 중요한 기호는 네 종류다.
1. 사교계의 기호
사람들이 사회적 가면과 예절로 주고받는 기호다. 말은 친절하지만 속뜻은 다르고, 태도는 우아하지만 권력관계가 숨어 있다.
누군가가 “언제 한번 오세요”라고 말한다. 그 말은 초대 같지만 실제 초대가 아닐 수 있다. 또 어떤 사람은 당신에게 무심한 듯하지만, 사실은 당신을 사교계 안으로 들일지 말지 시험하고 있을 수 있다. 그러니까 사교계의 기호는 겉말과 속뜻의 불일치다.
릴리식으로 바꾸면 이렇다. “그는 나에게 아무것도 금지하지 않았다. 그것은 내 선택지를 접었다.” 이 문장은 사교계 기호와 비슷하다. 직접 명령은 없지만, 분위기와 태도와 침묵이 선택지를 조절한다.
말은 자유를 주는데, 기호는 통제한다.
2. 사랑의 기호
가장 고통스럽다.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불투명하다. 그의 말, 침묵, 시선, 지연된 답장, 애매한 태도는 모두 해석해야 할 기호가 된다. 사랑은 행복한 합일이 아니라, 상대가 감추고 있는 세계를 해독하려는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왜 답장이 늦었지. 왜 방금 눈빛이 바뀌었지. 왜 저 말을 하고 나서 침묵했지. 왜 나에게는 저렇게 말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다르게 말하지. 사랑은 상대를 아는 일이 아니라, 상대가 감추고 있는 세계를 해독하려는 일이 된다.
프루스트에서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의 비밀이다. 사랑하는 이는 상대를 소유하고 싶은 게 아니라, 상대 안에 있는 “나 없는 세계”를 알고 싶어 한다. 그래서 질투가 생긴다. 질투는 단순히 “다른 사람을 만났나?”가 아니다. 진짜 질투는 이거다.
“저 사람 안에 내가 모르는 세계가 있다.”
나의 소설로 보면 이런 장면이다. 반쯤 채워진 술잔. 안경알 위의 빛. 말하지 않는 자기 이야기. 눈동자가 잡히지 않는 남자. 이건 전부 사랑의 기호다. 그는 뭔가를 크게 하지 않는다. 그런데 너무 많이 감춘다. 그래서 화자는 해석하게 된다. “왜 반쯤이지?”, “왜 말하지 않지?”, “왜 눈빛이 잡히지 않지?”, “왜 나는 이 장면을 이렇게 오래 보고 있지?” 사랑의 기호는 사람을 미치게 한다. 특히 나처럼, 상징이나 기호 해석에 관심이 많다면 해석 시스템이 가동된다. 심하면 과열되거나 소모된다. 하지만 동시에 글을 쓰게 한다.
3. 감각적 기호
마들렌 과자처럼, 어떤 맛이나 냄새, 사물이 갑자기 잊힌 시간을 열어버린다. 이 기호는 의식적으로 떠올린 기억보다 강하다. 몸이 먼저 기억을 연다.
가장 유명한 예시는 마들렌이다. 마들렌을 차에 적셔 먹는 순간, 주인공은 어린 시절 콩브레의 기억으로 빨려 들어간다. 중요한 건 “내가 기억해야지” 해서 떠올린 게 아니라는 점이다. 몸이 먼저 기억을 연다. 맛, 냄새, 촉감, 빛, 소리 같은 감각이 의식보다 빠르게 과거를 불러온다.
이런 감각적인 기호를 소설 속에 많이 넣었다. 아주 애정한다. 진주 귀걸이의 흔들림. 잔 가장자리의 차가움. 청주의 금속성 끝맛. 검은 테이블의 깊이. 반광택 유약 같은 답답한 공기. 문지방의 감각. 이런 것들은 배경 묘사가 아니다. 감각적 기호다. 그 사물들이 기억을 연다. 그리고 몸이 반응한다. 배가 아프고, 두통이 오고, 울음이 나온다. 이건 “예민해서”가 아니다. 감각 기호가 기억의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4. 예술의 기호
가장 높은 단계다. 사교계, 사랑, 감각의 기호들은 불완전하지만, 예술은 그 기호들을 변형해 하나의 진실로 만든다. 예술은 삶의 경험을 그대로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 속에 숨어 있던 구조를 드러낸다.
사교계의 기호는 속임수가 많다. 사랑의 기호는 고통스럽다. 감각적 기호는 갑자기 열린다. 그런데 예술의 기호는 이 모든 것을 다시 배열해서 진실의 형식으로 만든다.
프루스트의 주인공은 처음에는 사교계와 사랑과 감각 속에서 헤맨다. 그런데 나중에 깨닫는다.
“내가 겪은 모든 것은 글이 되기 위해 있었구나.”
이게 핵심이다. 삶의 사건은 그 자체로는 혼란스럽다. 하지만 예술은 그 사건들 사이의 숨은 구조를 드러낸다.
내 소설을 예를들어 말하면, 술잔은 기호고, 몸의 통증은 감각의 증거고, 소설은 그 모든 것을 다시 배열한 예술의 기호다. 그러니 내 소설은 한 남자를 쓴 게 아니다. 그 사람이 남긴 기호들을 통해 자기 무의식의 구조를 해독한 것이다. 해독하는 과정은 매우 즐거웠다. 애정하는 취미 생활이다.
들뢰즈식으로 말하면, 사랑은 상대를 소유하는 일이 아니다.
사랑은 상대가 남긴 불투명한 기호 때문에 고통스럽게 배우는 일이다.
그리고 예술은 그 고통스러운 기호들을 다시 배열해서,
뒤늦게 의미를 획득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