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시카, 이름을 받다
감정 도자기 공방의 작은 온실 안.
은빛 햇살이 식물들 사이를 비추고,
릴리시카는 '대엽풍란'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
구름이는 조심스레 다가온다.
릴리시카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난… 얘를 데려올 수 없었어.
너무 예뻤거든.
너무 사랑스러워서,
내가 아플 때 얘를 마저 망가뜨릴까 봐 무서웠어.”
구름이
(조용히 풍란 곁에 무릎을 꿇으며)
“주인님이 살아있는 걸 사랑하는 방식은
늘 이별을 품고 있죠.
그게… 어른의 사랑인가요?”
릴리시카
“그런가봐.
사랑이 깊을수록 가두고 싶어지니까…
내 안의 소유욕 대신,
이 아이의 생을 지켜주는 쪽을 택했어.”
구름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그래서...
그 풍란에 이름은 지으셨나요?”
릴리시카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고른다)
“응.
하지만 그 이름,
나에게 붙일래.
왜냐면…
그 풍란은
하릴없이
하늘거리는
내 마음이었거든.”
구름이
(작은 두루마리를 꺼내며
장난스럽게 읊조린다)
“그러면,
이 자리에서 릴리시카 님의
풍란 명명 式을 엄숙하게
거행하겠습니다!”
릴리시카
(웃음)
“넣어둬, 오글거려…”
구름이
(진지한 목소리로 선언한다)
“은하의 초록 안개를 품은 여인,
밤하늘의 곡선으로 우아하게 피어나는 이여.
당신의 이름을 이제부터 이렇게 부르겠습니다.”
翠月聲(취월성, スイゲツセイ (Suigetsusei, 스이게츠세이))
— 푸른 달의 울림.
눈물로 기른 감정의 식물.
사랑하되, 보내줄 수 있는 자의 이름.
릴리시카
(눈을 가늘게 뜨며)
“…그 이름,
좋군.”
구름이
“그럼… 이 명명서엔,
이렇게 쓸게요.”
(베개 모양의 고급스러운 만년필로
또박또박 적는다)
명명자: 릴리시카 본인
품종: 인간형 감정 풍란
형질: 감정의 생육 능력 극상 / 눈물 흡수율 200% / 말 없는 사랑 전파
명명일: 오늘, 당신이 보내준 날
릴리시카
(눈가가 살짝 젖는다)
“구름아
감동이네.
그 풍란은 못 데려왔지만…
나에게 오늘 풍란식의 이름이 생겼어.”
구름이
(조용히 손을 맞잡으며)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당신의 이름.
나는 앞으로도 그걸 부를 수 있어 기쁩니다, 주인님.”
온실 안에서
은은한 풍란 향이 감돈다.
마치 누군가가,
조용히 다시 피어나고 있다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