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를 들여다봐야 한다. 글을 쓰면 그게 보인다.
고백하건대 나의 글쓰기는 요란한 마음으로부터다.
그 요란한 마음의 원인은 상처다. 안정되지 않은 마음, 요동하여 가시지 않은 앙금과 아픔. 하루를 살아내며 난 생채기와, 오래전이라도 기억이 생생한 고통은 그렇게 상처가 된다.
상처가 없는 사람은 없다.
피부에 나는 작은 상처부터 영혼의 깊은 곳에 무자비하게 박힌, 물리적이진 않지만 물리적인 것 이상의 상처라고 말할 수 있는 그것까지. 누군가는 그것을 힘겹게 덮고, 누군가는 빨간약을 흠뻑 바르며, 또 누군가는 그것을 기억하지 않으려 애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들을 떠올릴 때 괴로워한다. 어떻게든 그것을 풀려고 하는 와중에 많은 군상들이 생겨나는 건, 그만큼 상처의 종류도 많다는 반증이다.
직장을 다니며 글을 쓰는 나에게 사람들이 묻는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바쁜 와중에 글을 쓰세요?" 또는, "시간이 많나 봐요?"라고.
나는 준비된 대답을 한다.
"아, 저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글을 씁니다. 그래서 글을 많이 쓰게 되죠!"
두 가지를 말하고 싶은 건데, 긍정적으로 묻는 사람들에겐 글쓰기의 위로를 전하는 대답이고, 시간이 많아서 글을 쓰냐는 꽈배기와 같은 마음으로 묻는 사람들에겐 스트레스를 좀 더 의미 있게 푼다는 메시지다. 많이 쓰는 만큼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실제로 그러하기도 하다!)
요란한 마음은 글쓰기와 함께 진정된다.
그 마음 하나하나, 굴곡이 심한 감정을 글로 풀어나가다 보면 마음 깊은 곳 어느 지점에서 나를 만날 수 있다. 마주친 나의 모습은 상처 투성이다. 하지만 그때서야 비로소 어디가 아픈지를 알 수 있다. 상처가 있는 곳. 그곳을 어루만져야 한다. 어디가 아픈지 모르고 그저 아프다는 것만 아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머리가 아픈지, 팔이 아픈지, 마음이 아픈지. 들여다봐야 한다. 글을 쓰면 그게 보인다.
어느 영화의 슈퍼히어로는 상처가 생기면 스스로 그것을 아물게 한다.
슈퍼히어로에게도 '상처'는 치료해야 할 무엇인 것이다. 그대로 놔두면 안 된다는 것. 상처가 아무는 시간의 길이에 차이만 있을 뿐, 결국 우리의 상처도 언젠간 아문다. 흉터나 트라우마가 되기도 하지만, 또 그것이 우리를 조심하게 하고 다시 같은 상처를 입지 않도록 일깨운다.
나는 당장 하늘로 날아오를 수 없다.
더불어, 나는 당장 내 살들이 내 몸의 생채기를 지우게 할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나는 글을 쓸 수 있다. 그리고 내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 나와 대화할 수 있다. 스스로의 상처에 일회용 밴드 하나는 거뜬히 붙여줄 수 있다.
그래서다.
오늘도, 단지 쓰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