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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Mar 03. 2020

'영향력'은 '간섭'을 뜻하는 게 아니다.

'영향력'과 '간섭'은 구분해야 한다.

사회적 만남
그곳에서 생기는 간섭현상


충조평판이란 말이 있다.

충고, 조언, 평가, 판단의 앞 자를 딴 것이다. 이 네 단어의 공통점은 두 글자라는 것 외에도, 남을 내가 어떻게 하고자 하는 마음을 담았다는 데 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적'이란 말 안에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단 말이 내포되어 있다. 그 영향의 오고감은 '동등'하지 않다.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좌우 사선이나 직선으로 작용하는데 대부분의 사회적 스트레스는 이것으로부터 온다.


한자의 사람 '인(人)'은 두 사람이 기댄 것에서 유래를 찾는다.

기대어 살아가는 것이 사람이라는 뜻인데 얽히고설킨 사회생활은 이 사람 '인'자 같이 간결하지 않다. 기대고 싶은 사람이 나를 거부하는 경우도 있고 그 반대의 상황도 있으며, 누군가와는 기대지 않고 혼자 걸어가고픈 때도 있다. 더불어 (원하지 않더라도) 두 사람이 아닌 수 십, 수 백 명과의 관계도 있을 수 있고 사회적 가면을 여러 겹 쓰고 만나다 보면 감정의 피로는 극에 달한다.


더 큰 문제는 이 얽히고설킨 사회적 만남에서 생기는 '간섭'이다.


이 간섭 현상으로부터 내가 누군가를 어떻게 할 수 있다는 헛된 마음이 충고, 조언, 평가, 판단을 토해내게 하는 것이다. 반대로, 그러한 (마음 없는) 토사물을 예고 없이 받아들였을 땐, 그저 하루가 멍하다.

여기에서 오는 사회적 갈등과 소모적 논쟁은 시대와 세대를 아울러 여기저기서 폭발하고 있다는 게 나는 참 안쓰럽다.


'영향력'이라는 사람의 본능


사람은 본능적으로 타인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싶어 한다.

내가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쳐, 그 상대가 내가 바란대로 움직일 때 또는 그 영향력에 감사해할 때 희열을 느낀다. 여기엔 심리적으로 복잡한 기제들이 숨어있다. 누군가를 설득했다는 성취욕부터, 내가 아닌 타인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자기 존재감과 효능감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그래서 '영향력'을 끼치려는 사람들이 많은 시대가 되었다.

실제로, 큰돈을 벌어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그 과정과 이면엔 누군가에게 끼친 '영향력'이 있다. 누군가는 그 영향력을 인정하여 지갑을 연 것이니까. 그러나 그것이 선한 것인지 아닌지는 별도의 문제다. 아이폰을 만든 스티브 잡스는 커뮤니케이션과 문명의 이기라는 영향력을 주었고, 불법 인터넷 도박을 만든 사람은 순간의 쾌감과 짜릿함이라는 영향력을 주었는데 누군가는 영향을 크게 받아 지갑을 열었다는 것이 같다.


'선한 영향력'이란 말이 나와서 말인데, 나는 이 말을 좋아하고 추구한다.

'영향력'의 올바른 예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영향력이라면 언제든 환영이다. 내가 끼친 선한 영향력이 또 다른 영향력을 낳고, 그것이 전해져 시너지 효과를 내는 사회를 나는 갈망한다.


'영향력'과 '간섭'은 구분해야 한다.


그러나 '(선한) 영향력'이란 미명 하에 생기는 '간섭'이 난무하기도 한다.

이러한 비극은 '영향력'과 '간섭'을 구분 못할 때 일어난다. 아무리 좋은 '선한 영향력'이라 할지라도 이것을 강요하면 그것은 '간섭'이란 비극이 된다.


여기서 잠시, '간섭'의 뜻을 짚고 넘어가 보자.

간섭

1. 관계없는 남의 일에 부당하게 참견함
2. 소리나 빛 따위의 둘 이상의 동종 파동이 서로 겹쳐져 파동을 강화하거나 약화하는 것

- 어학사전 -

즉, '영향력'과 '간섭'을 구분하지 못하면 첫 번째 뜻이 되고 만다.


그러나, 나는 간섭이 마냥 나쁘지만은 않다는 걸 위 두 번째 뜻을 빗대어 말하고 싶다.

서로 겹쳐져 파동을 강화하거나 약화하는 건, 다양성의 다른 이름이다. 간섭을 통해 다채로운 작용과 현상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사회는 때로는 정-반-합의 과정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오고 가는 다양성을 나는 존중하고 수렴하는데 파동의 강약 고저 안에는 우리가 찾는 무언가가 있을지 모른다는 묘한 설렘이 있다.


게다가, 서로 겹쳐져 파동이 강화되거나 약화되어 최접점을 찾아 또 다른 현상이 발생하는 현상은, 어쩌면 이 시대가 원하는 '선한 영향력'의 또 다른 모습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항상 스스로를 돌아보려 노력한다.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생산자'의 삶을 지향하는데, 혹여라도 나의 영향이 누군가에게 '간섭'이 되는 건 아닐까. 


즉, 강요가 되거나 답정너의 자세로 다가가지 않도록 주의한다. 

그래서 내 저서에 달린 별 감흥 없다는 리뷰도 그대로 수용한다. 물론, 간혹 보이는 리뷰이긴 하나 그것은 꽤 쓰라린데 어차피 나의 의도는 읽는 사람의 해석과 받아들임은 뛰어넘을 수 없으니 설득하려는 마음을 접는다. 그 상태에서의 설득은 강요가 될 것이고, 깨달음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오는 게 아니라 시차를 두고 온다는 걸 상기한다. 더불어, 내가 하는 생각과 말이 누구에게나 다 옳을 수 없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영향력'은 '간섭'을 뜻하는 게 아니다.

그것을 혼동하면 '라떼는 말이야'가 되는 것이므로, '선한 영향력'을 추구한다면 항시 조심하려 한다.


정말, 하루하루가 배움이고 요소요소가 깨달음이다.




'직장내공' (나를 지키고 성장시키며 일하기!)

'오늘도 출근을 해냅니다' (생각보다 더 대단한 나!)

'아들에게 보내는 인생 편지' (이 땅의 모든 젊음에게!)

'진짜 네덜란드 이야기' (알려지지 않은 네덜란드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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