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을 잡아채는 '가끔'의 미학.
'가끔'이란 단어의 손짓
추억이 묻어나는 그 옛날의 미니홈피.
그 시절, 한 여자 연예인의 사진이 유명세를 탔다. 사진과 함께 게시된 글은 '나는 가끔 눈물을 흘린다'였는데, 진지한 허세가 담긴 그 사진의 여파는 매우 커서 십 수년이 지난 지금에까지 온라인의 어딘가에서 떠돌고 있다. 지금 생각하면 자신이 그 사진을 왜 찍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대중들에게 잊히지 않으려 발버둥 쳐야 하는 연예인의 신분을 생각하면 그리 나쁜 것 같지도 않다.
그런데, 그 사진과 글을 보다가 갑자기 '가끔'이란 단어가 나에게 손짓하는 것을 느꼈다.
무엇을 깨닫게 하려는지, 다가온 그 단어를 보며 뜨끔했다.
문득, '가끔'은 우리 삶에 쉼표와 같단 생각이 들었다.
'가끔 무언가를 하는 우리'는 즉시 그 순간을 알아챈다. 우리는 일상이나 반복되는 일에 지쳐 있지 않은가. 삶의 순간을 인식하지 못하고 누군가 설계한 듯 자동적으로 살아가는 느낌. 정신 차려보면 하루가 가고, 두리번거리다 몇 년을 보내는 삶에 우리는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다.
그러니 우리는 순간을 인식해야 한다.
인식하지 못하는 순간은 시간의 함정이자 횡포다. 매 시, 매 분, 매 초를 인식한다면 정신 차렸을 때 시간이 저 멀리 가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을 어찌할 수 없다. 시간에 대항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지금 이 순간을 또렷하게 알아채고 만끽해야 하는 이유다.
그 '순간'을 떠올리게 하는 게 '가끔'이란 단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숨 쉬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자주 잊는다. 너무 당연한 것이어서. 매일 하는 것이어서. 한 순간도 숨을 쉬지 않은 적이 없어서.
그러다 '가끔'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그리고 바로 그때, 나는 깨닫는다.
'가끔'을 통한 삶의 반추,
나와의 만남
매일 숨을 크게 들이쉴 순 없다.
가끔 그렇게 숨을 크게 들이쉬며 우리는 숨 쉬고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아챈다.
이와 같이 너무도 당연해서 우리가 잊고 사는 것들이 많다.
가족들에게 당연한 듯 사랑한다 말하는 것을 생략하고, 고맙다 말하는 것도 가뭄에 콩 나듯 한다. 매일 먹는 밥의 소중함도 잊고, 타고 다니는 대중교통의 존재도 너무나 자연스레 받아들인다. 그러다 가끔 가족들과 떨어져 봐야, 밥을 먹지 못해 봐야, 파업으로 대중교통이 제대로 운영되지 않아 봐야 우리는 무언가를 깨닫는다. 그 무언가를 깨달으며 비로소 우리는 자신을 발견하고, 내 삶이 어떻게 흘러왔는지를 순간 자각한다.
반대로, 우리는 무언가를 '가끔' 함으로써 스스로를 자극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가끔 운동화 끈을 동여맨다. 운동화 끈을 동여매면 무엇이라도 결심하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그 결심은 평소보다는 좀 더 단단한 다짐이 된다. 밑도 끝도 없이, 가끔 동여매는 운동화 끈은 나로 하여금 다시 달릴 수 있는 용기를 갖게 하는 것이다. 실제로 달려도 좋고, 그렇지 않아도 이미 마음은 어느 출발 선상에 있게 된다. 발목에 조여 오는 유쾌한 긴장감을 오롯이 받아들이면서.
이렇게, '가끔'을 일상 속으로 불러와 보자.
그 단어를 '매일 하는 어느 것'에 갖다 붙이면, 그것은 생각지 못한 특별한 것이 된다. 또한, 매일 하지 않던 것이지만 '가끔' 무언가를 하면 또 다른 일상이 펼쳐진다. 가끔 산책하고, 가끔 그림을 그리고, 가끔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을 만나고, 가끔 내 생활 반경을 벗어나 보고, 가끔은 영화를 혼자 보고, 가끔은 소비만 하지 말고 무언가를 생산해보고. 아, 가끔 눈물도 흘리며 셀카를 찍어도 보고. 향기로운 칵테일에 취해도 보고.
순간은 잡을 수 없다는 게 어쩐지 행복과 닮았다.
그 순간을 인식하고 알아채면 행복은 아주 조금이라도 더 선명하게 보이지 않을까.
'순간'을 잡아채는 '가끔'의 미학.
삶의 또 다른 깨달음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