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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Mar 14. 2020

소신에 대한 대가를 치를 용기

내 소신의 가치는 내가 치른 대가와 비례한다.

굳게 믿거나 생각하는 바


소신을 굽히지 말란 말이 있다.

즉, 소신은 곧다. 굳게 믿으려면 그 정도의 곧음과 단단함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단단함이 없으면 휘어지고 부러지게 되는데, 그 순간 소신은 소신이 아니게 된다는 정서가 가득하다. 그래서 어떤 이는 소신이 변형되는 모습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두려워한다.


소신을 굽히지 않고 그대로 가져가는 건 정말 어렵다.

이 세상엔 내 소신만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소신도 있기 때문이다. 굽히지 않는 그것들이 만나면, 합을 이루어 무언가를 이루어내기도 하지만, 합이 맞지 않아 어느 하나는 부러뜨려야 자신의 소신을 지킬 수 있는 비극이 일어난다. 그리고 어느 정도 살아와봐서 알겠지만, 합이 맞는 경우보단 비극이 일어나는 경우가 더 많다. 그것 참 애석하게도.


더불어, 소신은 어떠한 상황이나 세상에 의해서도 변형된다.

세상이 정해 놓은 잣대나 기준, 규율과 행태에 따라 내 소신을 굽히거나 숨기거나 스스로 부러뜨려야 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먹고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소신을 포기하고 숨기고 부러뜨리는가. 이제는 소신 몇 개 정도는 변형하고 부러뜨려도 큰 죄책감이 없을 정도다. 아니, 아직 소신이란 게 남아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


소신은 나를 규정한다


그렇다면 소신이 없는 삶이 좀 더 편하지 않을까?

소신으로 삶이 얼마나 피곤해지는 줄 알면서 우리는 왜 자꾸 소신을 가지고 그것을 지키려 하는 걸까? 


'소신'은 나를 규정하기 때문이다.

나를 규정함으로써 사람은 '존재'를 인지한다. 한 순간이라도 내가 나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면 사람은 불안하다. 나만의 생각, 나만의 느낌이 없으면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란 걸 사람들은 잘 안다. 차라리 부딪치고 꺾이고, 다시 부러진 소신을 꾸역꾸역 곧이 세우는 일이 있더라도 소신껏 살아가려는 이유다.


그런데 재밌는 건 나의 소신은 누군가에게 고집이고 아집일 수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소신을 보면 쉽게 수긍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내 것은 소신이지만, 네 것은 고집이나 강박이라고 쉽게 말하는 사회 한가운데 우리는 서 있다. 즉, 나 스스로는 자신을 규정하는데 서툴지만, 다른 사람은 쉽게 규정한다. 어쩌면 다른 이를 쉽게 규정함으로써 나는 너와 다르다는 또 다른 규정에 대한 확신을 얻으려는 아이러니한 반대 심리로도 볼 수 있다.


그렇게 '소신'은 어떠한 존재를 규정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소신엔 대가가 따른다!


문제는, 소신엔 대가가 따른다는 것이다.

나를 규정하는 게 쉬울 줄 알았는가. 내 소신은 다른 사람에게 있어 이해할 수 없는 고집 정도로 치부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소신만 귀한 줄 알지, 남의 소신은 무시하거나 꺾어야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 소신을 밀고 나가려면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 삶의 공식이다.


작년은 내게 참으로 힘든 나날들이었다.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고, 기대하지 못한 많은 성과를 이뤘다. 책이 연달아 출판되고, 여기저기서 강연 요청이 들어왔다.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생산자'라는 소신을 지켜 나가기에 아주 좋은 일들이었다. 더불어 그것은 직장인으로서의 본업에도 좋은 영향을 주었다. 내 '업'에 대한 중요성을 느끼고,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받아들이는 선순환 구조를 이루었으니.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일어났다. 시기와 질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내 소신이 남들에게는 우습게 또는 사치스럽게 보였을까. 글을 쓰고 출판을 하는 것 자체에 대한 비난이 생겨났다. 개인적으로 믿었던 사람이 뒤에서는 내가 딴짓을 하는 것 같다며 수군대고, 조직에서는 경고 아닌 경고를 주었다. 내가 아무리 설명하고, 그것은 딴짓이 아니라 글쓰기를 통한 자아실현이 목적이었다고 해도 곧이 전달되지 않았다. 취미가 글쓰기가 되었고, 글쓰기를 통해 나온 선물과 같았던 결과들이 갑자기 초라해 보였다. 내 소신들이 변형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작년 한 해를 아주 잠시 내 영향력을 위한 생산물로 기뻐하다, 대부분은 회의를 느끼며 우울해했다.


그러다 한 선배에게 힘든 마음을 내어 놓고는 조언을 들었는데, 적잖은 위로와 큰 깨달음이 되었다.


"대가를 치렀다고 생각해. 그게 마음 편해."


과연 그랬다.

나는 대가를 치른 것이다. 일도 잘하고, 책도 내고, 강연도 한다는 그 모든 인정을 받고 싶었던 욕심은, '대가'를 치르지 않겠다는 잘못된 마음이었던 것이다. 대가를 치르지 않은 마음은 불편하다. 뭔가 켕기고, 좌불안석이다. 좌석표 없이 영화관이나 기차 안에 앉아 있는 기분이랄까. 누가 오면 어쩌지, 내가 지불하지 않은걸 들키면 어쩌지라는 마음은 영화 내용에 집중할 수 없게 하고, 차창 밖의 풍경을 오롯이 바라볼 수 없게 만든다.


대가엔 의미가 있고,
치르고 나면 더 당당해진다!


썩어 문드러질 것 같은 마음의 고생.

지금까지 걸어온 내 길이, 이 방향이 맞나 하는 의심과 회의, 무언가를 포기하고 내려 놓고 싶었던 처절한 기억. 그 모든 것이 대가였던 것이다.


내 소신의 가치는 내가 치른 대가와 비례한다.

얼마나 큰 마음의 고생을 했는지, 얼마나 큰 고통을 이겨냈는지. 죽을 것 같았던 인내와 받아들임의 역치를 넘고 나면 소신에 대한 영수증이 날아온다. 


아, 내 소신이 참으로 값비싼 것이었구나.




대가를 치른 소신은 앞으로 더 성장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대가를 치르고 나면 마음이 편하고, 그제야 내 소신이 얼마나 값어치 있는지 깨닫게 되고, 나와 내 소신은 좀 더 강해지는 것이다. 


그 대가를 치르지 않으려고 다른 사람들에게, 

어느 세상에 나를 맞추던 모습을 조금씩 줄어나가면서.


지금 다들 어떤 일로 힘든지 모르겠다.

그런데 분명 힘든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그럴 땐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좋겠다.

나는 지금 무엇을 지켜내려고 이렇게 마음이 불편하고 아픈 것일까.


참고로, 대가를 치르고 내 소신을 다시 한번 더 확인한 나는, 이제 조금은 더 편한 마음으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견디는 힘' (견디기는 역동적인 나의 선택!)

'직장내공' (나를 지키고 성장시키며 일하기!)

'오늘도 출근을 해냅니다' (생각보다 더 대단한 나!)

'아들에게 보내는 인생 편지' (이 땅의 모든 젊음에게!)

'진짜 네덜란드 이야기' (알려지지 않은 네덜란드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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