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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Mar 17. 2020

반지하의 기억

혹여라도 마음이 가난해지진 않을지 그게 두렵다.

기억의 힘은 대단하다.

기억을 떠올렸을 때 우린 그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순간의 기억, 그리고 그 순간의 감정. 기억은 객관적이고 딱딱하지만, 감정은 주관적이고 말랑말랑한 무엇이다. 우리는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 우리의 뇌 속에서 해마가 기억을 떠올리면, 감정을 관장하는 편도체가 해마에 딱 붙어 그것을 동시에 불러온다. 옛 흑역사를 기억하면 얼굴이 화끈거리고, 이별의 순간을 기억할 때 마음 한 곳이 저미는 이유다.


그래서다.

영화 기생충을 볼 때 반지하의 기억과 감정이 강제로 소환된 것은. 벌써 20년이 훌쩍 지난 이야기다. 국민소득이 지금보다 한참 낮았고, 건설/ 부동산 붐은 지금에 비할바 못되었기 때문에 반지하는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여전히, 당시에도 반지하는 가난한 자들의 전유물이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대학생 때까지 이어진 반지하 생활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우리 가계의 정도를 잘 나타내 주는 척도이기도 했다.


내 방 옆엔 작은 다용도실이 있었다.

대학생 시절, 비가 오는 날이었는데 하수구로부터 이상한 소리가 났다. 심상치 않은 전조. 갑자기 물이 꾸역꾸역 올라오기 시작했다. 울컥 대다 말 줄 알았던 하수구는, 거세게 구정물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화들짝 놀라 이리저리 막아봤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내 방과 다용도실을 막고 있는 벽은 종아리 중간 즈음의 높이였는데, 구정물이 이걸 넘어서면 내 방은 아수라장이 될 것이 뻔했다. 나는 무력했다. 그저 비가 그치기를, 구정물이 발목 이상 차올랐을 때 더 이상 높아지지만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반지하는 여름에 시원하다.

반지하는 겨울에 따뜻하다.

그리고 반지하는 가난하다.


이것이 내가 가진 반지하에 대한 기억이다.

반지하의 기억은 곧 가난의 기억이고, 그것으로 부터 나에게 소환된 감정은 무력함 그 자체였다.


영화 기생충에서 검정 구정물이 지상으로 솟구쳤을 때, 나는 봉준호 감독의 디테일에 놀라지 않았다.

직접 경험한 일이었기에, 영화적 요소보다는 실제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 것이다. 반지하의 기억. 가난의 기억. 제발 1층이라도 좋으니, 우선 지상으로 탈출하고 보자 했던 가냘프고도 절실했던 외침.


가난과 무력함은 한 세트이므로, 나는 소환된 기억과 감정에 순응했다.


그러나, 그 시절이 불행했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가능성이 높다.

가난했기에 받은 설움보다는, 괜찮아질 거란 희망으로 쏘아 올렸던 공들이 많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금 돌아보면, 그 어려운 시기와 설움을 어떻게 이겨냈을까 싶지만 그 당시엔 나름 웃었던 날들이 많았던 것이다. 주위 모두 가난했지만 달그락 거리는 저녁 밥상의 소리는 정겨웠고, 나의 젊은 날은 가난함의 수치를 지독하게 끌어안을 정도로 (다행히) 철이 들지 않았었다.


지금 나는 먹고살만해졌다.

그러나 혹여라도 마음이 가난해지진 않을지 그게 두렵다.


내 방과 다용도실 사이 그 벽.

그 벽과 거의 평행선에서 멈췄던 그 구정물을 기억하며 나는 마음을 돌아본다.




반지하의 기억은 그렇게 시커멓고 무력하지만,

모든 기억은 내 인생의 한 부분이므로 그 기억과 감정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오늘도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견디는 힘' (견디기는 역동적인 나의 선택!)

'직장내공' (나를 지키고 성장시키며 일하기!)

'오늘도 출근을 해냅니다' (생각보다 더 대단한 나!)

'아들에게 보내는 인생 편지' (이 땅의 모든 젊음에게!)

'진짜 네덜란드 이야기' (알려지지 않은 네덜란드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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