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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Apr 02. 2020

감정과 이성의 균형을 위한 뇌 관찰법

'뇌'의 역할과 반응을 '알아차리는 것' 


남으로부터 공격받았을 때
나의 '뇌'가 반응하는 법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사방팔방에서 공격을 받는다.

그것이 개인적인 것이든 업무적인 것이든, 또 상대방이 그것을 의도했던 안 했든 간에 말이다. 그 통로도 대화, 전화, 메시지, 회의 중 의견 등 다양하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Episode 1.



공격적이었던 '이메일' 하나가 떠오른다.

누군가로부터 받은 그 메일은 보자마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우선, 수신자에는 임원진들의 이름들이 가득했고, 내용은 모든 것이 나를 포함한 우리 팀이 문제라는 일관적인 내용이었다. 내용도 논리 정연하지 않았다. 그저 상대방을 탓하는 내용. 보자마자 이것은 '공격'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눈 앞에 벌어진 이 위기에 대해 '변연계'가 생존을 위해 바로 작동했다. 바로 메일을 보내지 않으면 나와 우리 팀이 모든 걸 뒤집어쓰겠다는 공포, 그리고 혹시 이 메일을 본 임원진들이 가질 오해에 대한 두려움이 불현듯 올라온 것이다. 


나는 바로 반격하기 위한 이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이성과 합리가 파고들 자리는 없었다. 공격받은 그 감정 상태 그대로, 나는 어떻게 상대방에게 되갚아 줄 것인가에 골몰했다. 더불어, 대외적으로 나와 우리 팀에 대한 오해를 풀어야 함이 마땅하였으니 장황한 설명에 메일의 내용은 길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씩씩거리며 장문의 이메일을 마침내 보내려던 찰나, 오랜 직장생활을 한 경험이라는 '이성'이 그제야 개입을 시작했다.


"잠깐! 기다려봐. 지금 바로 메일 보내지 말고, 저장시켜 놨다가 1시간 후 읽어보고 보내. 또는 내일 보내던가. 서두를 것 없어. 상대방이 진흙탕에서 싸우자고 하는데 그대로 말리면 '이전투구'밖에 되지 않아. 그때 보내도 늦지 않으니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이후에 보내. 그때 내용을 보고 그래도 보내고 싶다면 보내도 되잖아.


나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잠시 가라 앉히고 그 메일을 저장함에 두었다. 

잠시 사무실을 벗어나 커피 한 잔을 한 뒤 돌아와 내가 썼던 메일을 열었을 땐, 이것이 내가 쓴 것인가 할 정도로 낯설었다. 감정이 극에 달아 써 내려간 이메일의 내용은 앞뒤가 맞지 않았고, 보낸 이의 내용에 '변명'하는 것에 급급한 내용이었다. 더불어 사실(Fact)나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고, 맞춤법마저 여기저기 틀려 있었다. 나는 그저 상방의 '공격'에 말려 감정적으로 수동적/ 부정적 커뮤니케이션을 했던 것이다. 이 메일을 송부했을 때, 이 글을 읽었을 모든 수신자들을 생각하니 정말 아찔했다. 아마 나는 공격의 이메일을 보낸 사람보다 수준이 더 떨어지는 사람이 되었을 것임이 뻔했다.


나는 다시 감정과 이성의 균형을 생각하며 이메일을 다시 써 내려갔다. 

이번엔 감정적으로 대응할 부분과, 사실(Fact)로 대응해야 할 부분을 구분했다. 섭섭하거나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내용에 대해서는 직접적이지만 공손한 어조로 반박을 했고, 사실관계가 필요한 부분은 자료를 보강하였다. 무엇보다 남 탓만 하는 상대방의 이메일과는 달리, 나와 우리 팀이 잘못한 부분은 인정을 하기도 했다. 이메일을 보내고 난 뒤에는 직속 임원과 유관부서에 부연 설명을 위한 전화 통화까지 직접 했다. 그리고 그 이메일에 명시되었던 issue에 대해 나와 우리 팀에 대한 오해는 무혐의(?)가 되었고 오히려 상대방의 태도와 매너, 그리고 업무상 과실이 문제가 되었다.


Episode 2.



"그래, 이번 사업본부 당월 이익률이 얼마라고 했지?


갑작스레 떨어진 질문이었다. 

평소 존경해 마지않는 어르신께서 물으신 내용이니 바로 대답을 잘하고 싶었다. 아마 머릿속의 '변연계'는 이 상황을 '위기'로 규정했을 것이다. 갑자기 물으시니 알고 있던 내용을 순간 잊어버렸고,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기 때문이다. 대답을 잘 못하면 미움을 받을지 모른다는 공포, 나의 이미지에 타격을 입거나 평소에 그런 것도 알지 못하냐는 피드백을 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이, 마치 길가다가 호랑이를 맞닥뜨린 사람처럼 나를 얼어붙게 했다. 


생존을 위해 나도 모르게 내가 택했던 방법은 바로 '아무 말 대잔치'였다. 

즉, 머릿속에 떠오르는 확실하지 않은 수치를 입밖에 낸 것이다. 물론, 그 이야기를 들으신 어르신은 고개를 갸우뚱하시더니 다시 확인하라며 기회를 주셨다. 결과적으로 나는 '거짓말'을 한 것이다. 평소에 자신이 맡은 업무에 대해 대답을 잘 못하거나, 그 상황만 모면하려고 거짓말을 하는 후배나 동료들을 보며 저러지 말아야지 했던 터라, 나 스스로의 그러한 행동에 무척 놀라고 실망한 기억이 난다. 변연계(감정/ 공포)와 전두엽(이성/ 합리)이 적절하게 작용을 했다면,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고 "잠시 잊었는데 바로 확인해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라고 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한편으론 국정농단 사태의 주범들이 일관적으로 자신들의 잘못한 행동들을 모르쇠로 일관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우선, 살아남기 위해서 아니라고 잡아떼야 하는 상황. 게다가, 당시에는 '범죄의 합리성'과 '상사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으니 자신은 그 일과 관계없도록 진술을 할 것이 뻔하다. 감정 (공포/ 두려움/ 자신의 이익을 위한 동기)으로 행동한 사람들이, 이제는 비합리적인 이성에 기대어 변명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다급하면 우선 거짓말을 하거나, 혐의에 대해 부정을 하고 본다. 

위에서 어르신의 말에 거짓말을 내뱉은 나 자신을 봐도 쉽게 이해가 된다. 국정농단 주범들의 예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생존을 위한 그러한 반응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될 수 있다. 다만, 한 두 번 이상을 거짓으로 일관하거나 이미 다 밝혀져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을 저 혼자만 부정해서는 안된다. 더불어, 나 또한 생존을 위해서는 이렇게 행동하고 반응할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관찰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싫어하고 증오하던 모습이라고 그저 회피하거나 지워버리려는 것보다는, 그것을 통해 추후에는 어떻게 감정과 이성의 균형을 맞출지 고민해야 한다.


그러니, 나의 마음을 돌아볼 때 심리학 그리고 각 '뇌'의 역할과 반응을 '알아차리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견디는 힘' (견디기는 역동적인 나의 선택!)

'직장내공' (나를 지키고 성장시키며 일하기!)

'오늘도 출근을 해냅니다' (생각보다 더 대단한 나!)

'아들에게 보내는 인생 편지' (이 땅의 모든 젊음에게!)

'진짜 네덜란드 이야기' (알려지지 않은 네덜란드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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