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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Mar 06. 2016

[영화 에세이] 존 말코비치 되기

역지사지의 끝판왕이 아닌, 역지사지 깨부수기

제목을 보면 언뜻 '역지사지'의 전도사나 캠페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스파이스 존스 감독은 '역지사지'에 대한 어떤 기억이나 트라우마가 있었던 것일까?


물론, 실제 영화 내용은 그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오히려 '역지사지'를 깨부수는 영화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다.




사람들에겐 강렬한 욕망이 있다.

그 욕망을 이루기 위해 어떤 이들은 모든 대가를 지불하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루기 어려운 욕망에 대한 선택은 역시나 소설, 미술 그리고 영화와 같은 문화적 자위도구일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누군가의 생각이나 상상의 나래를 보며 현실을 잠시 잊곤 한다. 나와 같은 생각 또는 내가 생각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자극을 즐기며.


그런데' 존 말코비치 되기'의 발칙함은 도를 넘었다.

기발하기는 하지만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설정이냐는 이질감에 각본가 찰리 카우프먼의 시나리오는 그렇게 할리우드에서도 줄줄이 거부당한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현실을 비집고 나올 수 있었던 것. 그리고 평단은 물론 일반 사람들에게도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속에 강렬하게 숨어있던 '남이 되어보고 싶은' 강렬한 욕망의 발현에 다름 아니다.


다른 사람의 몸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이 과학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강렬한 욕망이 이성을 잠재우고, 일단 다른 사람이 되어보자는 강렬한 욕심 때문이다.


이렇게 영화 초반 존 말코비치가 된 것을 받아들인 이상,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은 이해가 되지 않아도 그저 따라가야 한다. 강렬한 욕심의 대가다. 우리 스스로의 몫이다.


각오해야 한다.
그 내용들은 점입가경이다.




주인공이 일하는 회사의 층수는 7과 1/2층에 위치한다.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실제로 각본가 찰리 카우프먼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광팬이었다. 이상한 나라로 들어가기 위해 통과하는 토끼굴이, 존 말코비치가 되기 위해 들어가는 그것과 오버랩을 해보면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다. 오마주라고 해도 좋다.


더불어 7과 1/2층은 어딘가에 끼인 주인공의, 우리네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타인과 나, 직장과 가정, 현실과 이상, 상사와 부하, 젊음과 늙음, 사랑과 증오 등의 인생을 반추하게 만드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끼어있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터.


'존 말코비치 되기'를 경험하기 위해 돈을 지불하고 줄을 선 사람들. 7과 1/2층이라 고개를 숙이고 있다.




- 말코비치 : “난 지옥에 갔다 왔어. 아무도 봐서는 안 되는 걸 본 거야.”
- 크레이그 : “그래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아하던데.”
- 말코비치 : “저 통로는 내 거야. 하나님의 이름으로 영원히 차단시켜야 돼.”
- 크레이그 : “말코비치 씨. 무례한 말이지만 그 통로는 내가 발견했어요. 내 밥줄이라고요.”
- 말코비치 : “내 머리야! 내 머리라고! 법정에서 보자고.”


마침내 존 말코비치마저 그 통로를 발견하고 들어가기에 이른다.

'자아'를 찾을 것이라는 우리의 기대는 보기 좋게 날아가고. 자신 속으로 들어간 존 말코비치는 혼란에 혼란을 더하게 된다.


모든 사람이 자신으로 보이고,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존 말코비치'라는 이름뿐.

'나'를 찾고, '나'를 알아가면 어떠한 진리가 보일 것이라는 통념을 보기 좋게 부숴버린다.


더 섬뜩한 것은 자본 앞에 무시되는 '자아'다.

몰래 그 사람 속으로 들어간 것은 전혀 미안할 일이 아니다. 발견한 사람이 임자란다. 임자.

그리고 밥줄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모습이라니. 이것이 현실과 같아 더욱더 무섭다.


앞서 언급한 역지사지는커녕, 그 단어는 지나가는 개에게나 던져준 모양새다.




영화의 말미. 하나의 몸에, 영생을 갈구하는 여러 사람들이 들어가는 모습이 그것을 장식한다.

몸을 버리고 영생을 이룬 자. 반대로 몸을 점령당한 자.

몸을 버린 자는 누구이며, 몸을 점령당한 자는 누구일까?


누군가 되기 위해 나를 부정해본 적이 있는가?

여러 자아가 존재하는 우리 몸은 누군가에게 점령당한 것일까?


영화는 결국, 우리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

말도 안 되는 질문이지만 몇 날 며칠을 고민하게 하는 질문이다.


살아가다 보면 남이 이해가 안되고, 나 자신이 이해가 안 되는 순간이 많음을 영화는 꼬집어냈다.

그리고 우리는 보기 좋게, 그대로 꼬집히고 말았다.


아프다.

맘이 무겁다.


'나'라는 존재의 가치와 의미를 묻는 질문이 가볍지 않고.

그래서 이것들은 어쩌면 평생 따라다닐지 모른다.


아이쿠.

분명히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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