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팅 구루와의 만남
비상경계여서 슬픈 존재여.
죄송합니다.
귀하의 뛰어난 역량에도 불구하고
제한된 모집 인원으로 인해
좋은 소식을 전해드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지원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그렇지 뭐.'
문과 청년의 포기는 빨랐다.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1차 면접까지 간 게 어디야...라는 위안을 스스로에게 하며 가장 가까이 보이는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10월의 하늘은 청명했다. 하늘의 새는 방금 면접 탈락 문자를 받은 문과 청년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유롭게 어딘가로 날고 있었다. 거리는 저마다의 목적지와 방향으로 향하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문과청년만이 일시정지된 느낌으로 그저 벤치에 앉아 있었다.
'내가 갈 곳은 있는 걸까?'
푸념 섞인 생각을 할 그즈음.
'띵~!'
문자 알람 소리가 울렸다.
"야, 너도 탈락했냐? 아니, 수소문해 보니까 문과 전공은 싹 따 떨어뜨리고 경영/ 경제 학부 애들만 싹 다 뽑아갔더라고. 아, 문과라서 비상경계여서 정말 서럽다. 이럴 줄 알았으면 복수 전공이라도 해둘걸."
함께 탈락한 문과 친구로부터의 문자였다.
문과 청년의 손은 떨렸다.
그 문자에 답장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마음이 울컥했다. 전공을 선택해야 했던 고등학생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좀 더 열심히 공부하지 않아 의대를 지원하지 못했던 과거의 자신이 그렇게도 못나보였다. 아니면, 괜한 고집 피우지 말고 상경계열을 선택했어야 했나 후회가 바다의 밀물처럼 몰려들어왔다.
그 회사의 1차 면접은 단체면접이었다.
여의도의 어느 한 호프집을 전세 내어 진행된 면접은 당시엔 매우 획기적이었다. 테이블 당 과장부터 부장급의 현직자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면접자들은 10명이 한 조로 편성되었다.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모두가 시원한 맥주를 들이키며 선배의 이야기를 듣는 그런 분위기였다.
물론, 그때에도 문과 청년은 평가당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 평가와 판단은 이미 끝난 뒤였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문과 학생들은 들러리였던 것이다.
마케팅 구루와의 만남
눈물이 반쯤 눈에 들어찼을 때, 어느 사내가 문과 청년에게 다가왔다.
"학생.. 맞죠? 대학생인 것 같은데 기분이 많이 안 좋아 보이네요. 괜찮나요?"
세련된 정장에 깔끔한 헤어스타일을 한 회사원인 듯 보였다.
사내의 목엔 어느 한 회사의 사원증이 걸려 있었다. 문과 청년이 가고 싶어 하는 회사 중 한 곳이었다. 지금 당장 그 사내가 문과 청년을 그 회사에 들여보내준다면 문과 청년은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네, 대학생 맞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요즘 한창 취업 시즌이잖아요. 힘이 없는 걸 보니, 취업 때문에 힘드신 게 아닌가 해서요. 20년 전 제 모습 같기도 해서요. 마침 오늘은 다른 날보다 좀 일찍 퇴근하던 길인데, 왠지 그냥 지나치면 안 되겠단 느낌이 들었어요. 왜 그럴 때 있잖아요. 살다 보면 느껴지는 신비한 느낌이랄까. 데자뷔 같기도 한. 그러고 보니 처음 뵙는 거지만 왠지 낯설지가 않다는 생각까지 드네요."
사내는 양해를 구하는 눈짓을 하더니 문과 청년 옆 벤치에 대각선으로 앉았다.
"맞아요. 사실, 오늘 면접 불합격 문자를 받아서 기분이 좀 그래요. 게다가 문과라는 이유로, 비상경계라는 이유로 탈락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제가 4년 간 무얼 했나.. 란 자괴감도 들고요."
"아, 그렇군요. 사실, 저도 문과이고 비상경계입니다.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저 또한 취업 과정에서 문과라 당한 차별이 여럿 있었죠. 동지를 만난 기분이네요. 왠지 도움을 더 주고 싶은데요. 혹시 제가 도와 드릴 일이 있을까요? 필요하면 제가 멘토링을 해드려도 좋고요."
문과 청년은 이제야 고개를 들어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신감에 찬 눈빛, 전문가로서의 단단한 내공을 가지고 있는 듯한 품세. 무엇보다 문과 청년에게도 사내의 얼굴은 낯설지가 않았다. 친근함이 느껴지자 문과 청년은 이내 안도했다.
"그러면 정말 감사하죠. 실은, 어디에 하소연하기도 그렇고 이러한 이야기를 나눌 선배도 없어서 좀 막막해하고 있던 참입니다. 그런데 아저씨는.... 아, 아니 선배님...이라고 해도 되겠죠? 선배님은 무슨 일을 하고 계신가요?"
"하하하, 네. 아저씨보단 선배님이 좋겠네요. 아, 제 소개가 늦었네요. 저는 마케팅 전문가입니다. 재밌죠? 마케팅을 전공하지 않았는데, 마케팅 전문가란 타이틀로 제 소개를 하고 있어요. 회사에선 인재로 발탁되어 회사 지원으로 MBA를 공부했습니다. 해외 주재원으로 수년간 유럽과 중남미에서 일하며 다양한 문화와 인종의 사람들과 일하기도 했고요."
문과 청년은 이 사내를 만난 것이 내심 놀라웠다.
문과 청년이 하고 싶은 걸, 바라고 있는 모든 걸 이루어낸 사람이 눈앞에 앉아 있는 것이다.
"와, 정말 제가 하고 싶고 되고 싶은 모든 걸 이루셨네요. 정말 대단하시고 멋집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제 멘토가 되어 주시겠습니까? 마케팅 구루로 모시고 싶습니다."
"네,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그래야지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요. 제 취업시절의 어려움을 생각하며 수많은 후배들에게 멘토링을 해주고 있고, 대학과 기관에서도 마케팅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마케팅을 제대로 알려 주는 사람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도 드물어서 제가 마케팅에 대한 실체를 전해야겠다란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어요."
어느새 날이 어둑해지고 있었다.
가을의 저녁 바람은 서늘했지만, 문과 청년의 마음엔 온기가 서려 있었다. 마케팅 구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오늘 탈락한 상처를 치유받았다. '탈락'과 '마케팅 구루'와의 만남을 비교하자면, 마케팅 구루와의 효용이 더 클 것이란 생각까지 들었다. 하나를 주고 두 개를 빼앗아가는 삶이었는데, 그날만큼은 하나를 빼앗기고 두 개를 얻은 느낌이었다.
사내는 시간을 내어 문과 청년에게 1대 1 멘토링을 해주기로 했다.
문과라는 이유로, 비상경계라는 이유로, 마케팅을 잘 모른다는 이유로 취업이 어려웠던 자신의 옛 모습을 떠올리며. 남 같지 않은 문과 청년의 처지를 사내는 100%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연락처를 교환하고 각자의 길로 향했다.
그 둘의 얼굴엔 무언가 알 수 없는 기대와 희망으로 미소가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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