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순간이 철학이다.
철학은 세계와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본질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탐구를 위한 주된 수단은 바로 '질문'이다. '질문'은 '사유'를 생성한다. 물음표를 받아 든 존재는 가만있질 못한다. 그 물음표를 느낌표나 마침표로 바꿔야 한다는 알 수 없는 강박에 시달린다. 그러나 그 강박은 좋지 않은 게 아니다. 오히려 그 강박이 잦아들면, 자아는 옅어진다. 아이러니한 삶의 법칙이다.
젊은 날엔 답을 찾으려 혈안이 되어 있었다.
문제는, 그 질문을 내가 던진 게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던진 질문이 아닌 것에 대한 답은 또한 내 것이 아니다.
달달 외워서라도, 네다섯 개 안에서 하나를 찍어내어서라도 찾아낸 답은 의미가 없으며 쉬이 잊힌다. 다년간의 학습은 우리를 그렇게 '정답 인간'으로 박제한다. 온몸이 굳는 박제가 되어 가는지도 모르고 우리는 질문의 진위와 본질은 잊은 채, 영문도 모를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 동분서주해 온 것이다.
세상이 던진 질문에 답을 찾으면 삶이 나아질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나아진 것은 나를 제외한 세상 모두였다.
생존 본능이 발동한 것일까.
더 이상 이렇게 살면 안 될 것이란 생각이 엄습했다. 변화가 필요했다. 그 변화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시작되었다. 세상의 질문의 아닌, 내 안으로부터의 질문. 수 십 년 간을 당하고만 살았으나, 더 이상 당하지 않을 방법은 지금까지 살아온 것과 반대되는 것을 시도해 보는 것이었다. 알베르 카뮈가 말한 부조리한 삶에 대응하는 방법과 그 맥이 같다. 삶은 부조리하다는 걸 받아들이면, 불평보단 질문을 할 수 있게 된다. '반항'과 '저항'으로 함축되는 이러한 삶의 대응은 '질문'을 던짐으로써 시작된다. '삶은 왜 이리 부조리할까?'란 질문을 던지면,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낳고, 그 질문에 대한 스스로의 답을 찾으려 하다 보면 정답은 아니더라도 해답은 얻을 수 있게 된다.
또 하나.
답을 찾을 수 없을 땐, 질문을 바꾸면 된다.
답이 없다고 슬퍼하거나 당황할 필요가 전혀 없다.
항상 답이 있을 것이라 단정하는 것도 일종의 병이다. 답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오답인 적도 있었고, 답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들이 오히려 답이 된 적도 수두룩하다. 삶의 부조리에 놀아나지 않으려면, 답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 좋다.
남는 장사는 질문에 집착하는 것이다.
질문을 해서 좋지 않은 건 전혀 없다. 오히려, 질문하지 않아 야기되는 문제들이 더 많다.
앞서 철학은 '보편적인 본질'을 탐구하는 학문이라 했다.
본질을 파고들기에 '질문'만큼 확실한 수단이 없다. '질문'하면 '사색'하게 된다. '사색'하려면 '질문'해야 한다. '질문'과 '사색'이라는 반복과 번복을 순환하다 보면 삶은 정반합에 이르는 것이란 '보편적인 본질'을 마주하게 되고 '정(正)'에서 바라본 '반(反)'과 '반'에서 바라본 '정' 사이에서 놀아나던 우리는 그것의 부조리를 질문이라는 리듬으로 변주하여 춤을 추며 즐길 수 있게 된다.
나는 이 모든 과정을 '철학'이라 명명한다.
그러니까 철학이란 누군가의 전유물이 아니라, 일상에서 일상화해야 하는 삶의 법칙이자 지혜라는 걸 알아채야 한다.
내가 나이가 들며 철학자가 되는, 되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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