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르담 페르소나 글쓰기>
사람은 누구나 외로움을 느낀다.
설령, 사랑하는 사람이 있거나 나를 지지하는 가족들이 있어도 그렇다.
왜?
태생이 그러한 것이다.
내 삶을 누군가 대신 살아줄 수 없고, 우리는 타인의 감정에 감히 개입할 수가 없다.
그렇게 설계되었고, 그러한 운명을 지닌 것이니 이유 따윈 모르지만 절대자의 계획에 그저 순응하며 숨 쉴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숙제는, 이 '외로움'을 어떻게 받아들일까...라는 것이다.
외로움은 고립을 동반한다. 물리적 또는 정서적 고립에 빠져든 사람에겐 두려움이 엄습한다. 이는 생존 체계와 관련이 있다.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므로, 외로움을 타계할 방법을 찾고 사회적 유대를 통해 생존의 확률을 더 높이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 이르러, 물리적인 고립보다는 정서적인 고립이 더 심각하다는 걸 이제는 누구나 안다.
주위엔 사람이 들끓고, SNS엔 관심이 넘쳐나고 있다. 배고픈 시대에서 벗어나 음식이 남아도는 것처럼, 주위의 타인과 관심은 더 이상 부족하지가 않다. 오히려, 과해서 문제일 뿐.
무엇이 문제인지를 우리는 이미 안다.
먹어도 허기지고, 주위에 사람이 많아도 외로운 건 마음의 문제라는 것을. 외로움에 압도당하지 않으려면 외로움을 피하려 하기보단, 정면으로 마주하고 그 실체를 파악해야 한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은 이를 피한다.
소비로 풀거나, 악플로 시간을 허비하거나, 자극적인 무언가를 계속하여 갈구한다. 그러할수록 남는 건 허탈함 뿐이며, 회피한 외로움은 더 큰 고통이 되어 돌아온다.
반면, 외로움을 잘 마주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오히려 이를 통해 새로운 에너지를 얻는다.
'고독'은 '선택한 외로움'과도 같은데, 나는 이제 제법 고독을 잘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글쓰기와 함께 변화된 삶의 방식이다.
예전엔 외로움이 무서웠다.
회피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했다. 대개는 소비적인 것이었고, 또한 소모적이고 자극적인 무엇들이었다. 그것들을 좇으면 좇을수록, 나는 망가졌고 정서적인 외로움은 더 커졌던 것 같다.
글쓰기는 외로움을 받아들이게 해 준다.
피하지 않기 때문이다. 글을 쓰려며 생각을 해야 한다. 내 마음을 온전히 느껴야 한다. 자신을 파고 또 파야 한다. 외로움의 근원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규명되지 않는 외로움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는 힘과 지혜가 생긴다.
외로움을 글로 바꾸면 된다.
글로 바뀐 외로움은 나를 설명한다. 내가 왜 이러한지, 그리하여 앞으로 어떠해야 하는지. 외로움의 가치는 생각보다 크다. 누구가 옆에 있어도 외로움을 느끼는 건, 내가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친근한 경고이기도 하다. 백 명, 천 명이 내 옆에 있어봤자 뭐 하는가. 내가 내 옆에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내가 내 옆에 있는다는 건, 내가 스스로의 존재를 느끼고 인정한다는 것이다.
숨을 쉬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나'다. 누가 대신해 줄 수 없는 걸 우리는 왜 자꾸 그걸 잊고 다른 것에 한눈 팔려 사는 것인지.
외로움이란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오면, 나는 바로 글을 쓴다.
외로움도.
글쓰기도.
스스로 선택하면, 어렵고 불편한 것이 아니라 나를 이해하게 되는 아주 편안하고 평안한 여정이 된다.
외로움을 글로 바꾸면.
몇 배로 남는 장사라는 걸.
나는 확실히 말할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