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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Nov 02. 2015

한국인은 정말 미쳤을까? Part 1.

"프랑스인도 미쳤다!"

안녕? 젊음?

오늘 하루는 어땠어? 가을이라 날씨가 좋더라.

가을은 사람으로 하여금 무언가를 느끼게 하고 생각하게 하잖아?

그러기에 좋은 생각, 좋은 느낌으로 하루를 잘 보냈으리라 믿어. 우린 아직 젊기에...^^


난 오늘 그동안 벼르고 벼르던 글을 쓰려고 자리에 앉았어.

"정말 한국인은  미쳤을까?"라는 것에 대해 말이야.


어쩌면 글이 너무 길어질지 몰라.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거든.


그리고, 또 많이 민감한 내용들이 오갈 거야.

이미 저자는 민감한 부분을 많이 건드렸으니까.


'한국인은 미쳤다!'를 읽고 난 나의 생각과 결론은 다음과 같아.


첫째, 분명 맞는 부분이 있다.

둘째, 한국인에 대한 모함이다.


"프랑스인은 미쳤다!"


나는 이 말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해.

저자와 같은 관점에서 본다면 말이야.


먼저, 그래도 최소한의 배경을  이야기해볼게.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 몇 가지.


첫째, 불행인지 다행인지 저자가 일했던 그 회사에 내가 현재 몸담고 있고.

둘째, 북미/ 유럽/ 아시아/ 인도/ 중동/ 아프리카 등의 다양한 지역인들과 일을 해왔고.

셋째, 현재는 유럽에서 주재원으로 일을 하고 있어. 그리고, 유럽 내 북부/ 남부/ 서부/ 동부 등 대부분의 유럽인들과 일을 하고 있거든.


즉, 내가 앞으로 하는 말이 다 맞는 말은 아닐지라도 최소한 경험해보지 못하고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어느 정도는 객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거야. 프랑스인을 다른 지역, 다른 나라 사람들과 비교해서 볼 수 있는 시야도 있고.


저자가 이 책을 냈다는 소식을 들은 건 뉴스를 통해서였어.

어느 날처럼, 아무 생각 없이 휴대폰으로 뉴스앱을 눌렀는데 지극히 자극적인 제목에 친근한 얼굴이 보이더라고.


내가 기억하는 저자는 우리 회사의 당시 정책에 따라 임원으로 고속 승진하여 법인을 이끌던,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현지 서양인 치고는 그래도 한국 문화를 잘 이해하려 노력했던 사람이었어. 안타깝게도 일을 잘했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나오지 않았었어.


책은 자극적인 제목에 걸맞게 베스트셀러로 자리매김을 하더라.

'헬조선으로 불리는 작금의 한국 상황'과, '유럽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가지고 있는 한국인', 그리고 '유럽인이 직접 이야기하는 한국 대기업 이야기와 문화'라는 3 박자가  맞아떨어지면서 이루어낸 결과였지.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을 이야기하자면, 저자가 해고된 이후 회사에 대한 억화심정과 자신의 경력 및 얼마의 돈을 벌기 위해 그러건 아닐까... 왜 갑자기 이렇게 뒤통수를 칠까...라는 생각이 앞섰었어.


그래서 한국 출장을 가자마자 책을 집어들었지.


책을 다 읽고 나서 든 생각은 앞서 이야기한 결론과 같아.

그런데, 조금 더 살을 붙이자면.


첫째, 분명 맞는 부분이 있다. 우리는 변해야 한다, 그리고 변하고 있다!
둘째, 한국인에 대한 모함이다.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관점의 차이가 분명 있다.


그리고 내가 "프랑스인은  미쳤다!"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계속해서 이어 나갈게.


"프랑스인 이해하기"



학창 시절 세계사에서 배운 프랑스인에 대한 기억은 '자유', '평등', '박애'로 점철된 사람들이었어. 아마 우리 젊음들도 다르지 않을 걸?


그런데,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교과서를 떠나 실질적인 비즈니스나 일을 같이 해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비효율'과 '답답함'이야.


자, 이쯤 되면 막 가자는 거지? 아마 친한 프랑스인 친구가 있거나 프랑스에 대한 좋은 기억이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이 글을 읽지 않을지도, 아니면 벌써부터 나의 글에 반박할 준비를 할지도 몰라. 근데, 미안하지만 잠시 참고 쭈욱 읽어봐 줘. (나도 매우 친한 프랑스 친구가 있어^^)


내가 이렇게 이야기 하는건 건, 뭐다? 그래 바로 다른 문화에서 오는 관점의 차이라는 걸  이야기하고 싶은 거야.

물론, 다른 지역 다른 유럽 사람들과 비교해 봤을 때 (미안하지만) 프랑스인들이 좀 더 그러한 경향이 없지 않아 있어.


그렇다면, 이런 말이 나오게 된 배경에 대해 먼저 살펴보자. 프랑스 사람에 대해 잠시 언급 해볼게.


모든 프랑스인을 다 싸잡아서  이야기할 순 없지만, 대체로 이해하기 위해.

아, 우리 "한국인은 미쳤다!"의 저자께서도 일단 한국사람 다 싸잡아서 미쳤다고 했으니 비겼다고 보고.


라이시테 (Laicite), 톨레랑스 (Tolerance)
합리주의/ 개인주의/ 관용주의
프랑스 인의 '이중성'


프랑스인을  이야기할 때 그들을 나타내는 말들을 나열해봤어.

아마 익히 들어봤을 거야.


요약하자면, 프랑스인들은 합리주의/ 개인주의/ 관용주의를 표방하며 종교에 의해 정치나 공공/교육 생활에 영향을 받지 않고자 하고, 역사적으로는 전제왕권(기사)과 소시민이라는 그룹 그리고 인종적으로 '다민족'으로 구성되어 '프랑스인'은 이렇다...라고 말하기에는 여러 모순과 이중성이 발현된다는 거지.


"프랑스인의 업무 스타일"


이 세상 모든 것에는 반대급부라는 게 있어. 반대급부는 '어떤 일에 대응하는 이익 또는 대가'를 이야기 하지.

프랑스 인들의 합리주의/ 개인주의/ 관용주의에도 반대급부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싶은 거야.

그리고 그 반대급부가 업무 할 때 많이 드러나거든.


1. 합리주의 그리고 반대급부


프랑스인들은 스스로를 '까르티엥' (데카르트 주의자, 합리주의자)라고 부를 정도야.

매우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라는 거지.


그런데 여기서 잠깐, 참고로 이와 더불어 프랑스인은 '이중성'도 가지고 있어.

파리지엥, 특히 파리에 사는 사람들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기보단 태평하고 충동적이며 변덕스럽다고 알려져 있고, 호기심도 많고 놀이를 좋아하며 예술을 즐기나 불평이 많고 비판하기를 좋아한다고 해. 재치 있는 말과 행동도 잘한다고 하고.


합리주의는 말 그대로 합리적 일지 모르지만, 이것이 프랑스인의 개인주의와 잘못 결합이 되면 어떻게 되는지 혹시 알아?


한 가지 예를 들어볼게. 지금 발등에 불이 떨어졌어.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논리적으로 왜 이 불을 꺼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을 해야 할까?


비즈니스 환경은 이러한 일들이  비일비재해.

경쟁사가 도저히 이성적이고 논리적이지 않은 프로모션을 한다던가, 아니면 당장 내일 회사가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에서는 '무언가'를 신속히 협의하여 '무언가'를 즉시 실행을 해야 해.


그런데, 프랑스인들은 (개인적으로)논리적 이해가 안되면, 주저하지 않고 그 agenda를 보류시키거나 냉정하게 거절하거든. 물론, 상황에 따라 원인이 몇 가지로 해석될 수 있어.


즉시 실행해야 할 그것이 1) 논리적이지 않거나 또는 프랑스인을 설득 못 시켰거나, 2) 아니면 프랑스인이 그것을 (개인적으로)이해 못했거나, 3) 또 아니면 '논리적'으로 따질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거지. (발등의 불처럼)


1) 번의 경우는 회사의 잘못이야. 하지만 2) 번과 3) 번은 프랑스인도 고집 피우지 말고 함께 가야 한단 거지.


물론, 한국 사람은 1) ~ 3) 번의 상황에  상관없이 상사가 가자고 하면 가는 것이 문제야. 다들 알고 있듯이.

그런데, 방향이 맞다면 더 없이 신속하고 효율적인 결과가 나오게 되겠지.

방향이 틀리다면 안타까운 일이 발생할 것이고.


그래서 난 누가 맞고 틀리고의 문제는 아니라고 봐.

그저, 프랑스인의 특성이고, 한국인의 특성이라는 거지.


다만, 저자가 프랑스인의 눈으로 봤을 때 한국 사람이 미쳤다라고 한다면, 한국 사람의 눈에는 프랑스인도 미쳤다고 할 수 있다는 거. 그걸  이야기하고 싶은 거야.


2. 개인주의와 이기주의


개인주의의 반대급부는 말 안 해도 잘 알지? 맞아, 바로 이기주의야.


유럽 사람들, 특히 프랑스 사람은 유럽 사람들 중에서도 철저히  더욱더 개인주의적이지. 역사적으로 보면 가톨릭의 전제 왕권에 대한 반발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어. 프랑스 통합을 위해 가톨릭 종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던  그때 '보편주의'로 사람들을 획일적으로 묶으려 했었고, 이에 대한 반발심은 종교개혁과 18세기 계몽주의 그리고 이후 프랑스 대혁명까지 이어져 결국 '개인의 승리'가 이루어졌어.


개인주의가 이기주의로 변질되는 순간, 그 이상은 깨지고 마는데 이는 회사 생활에서도 볼 수 있어.

유럽 사람들은 일을 하고 휴가를 간다고 하기보다, 휴가를 가기 위해 일을 한다는 말이 들어맞을 정도로 휴가를  좋아하는데, 우리 프랑스인들은 보통 유럽 사람들 보다 더 그러한 성향이 있지.


예를 들어, 아무리 급한 일과 업무가 있어도 과감하게 휴가는 꼭 가고 말지. 이게 뭐가  잘못되었냐고? 그렇게 하는 게 정상이 아니냐고? 음... 그렇게 이야기하는 건, 지금  우리나라의 잘못된 현실에 대한 반발심으로 그런다는 건 잘 알고 있으니, 잠깐 다시 생각해보자.

(솔직히 유럽 문화를 동경하고, 우리도 그렇게 바뀌어야 한다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말하는 우리 젊음들도, 솔직히 바로 옆 동료가 이와 같이 행동한다면 어때?)


그래, 물론 휴가는 가야지. 아무리 급하고 중요한 업무가 있더라도. 그런데, 사전에 아무런 일정 조율을 안 했다면? 인수인계자가 없고, 백업 인원 준비를 안 했다면?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보고 참으로 '프로답지 않다'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프랑스인은 가끔 이를 '개인주의'로 포장을 하곤 해. '휴가'는 지극히 '개인적인'거니까.


같이 일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속 터질 일이야.

솔직히, 다른 유럽 사람 (특히 북부 유럽)들은 이 정도는 아니거든.


또 하나, 개인주의가 강하다 보니 팀워크의 효율이 떨어지는 부분이 분명 있어.

한 가지 예를 들어 볼까?


네덜란드에는 마케팅 담당자가 1명이 있어. 프랑스에는 3명이 있지. 물론 프랑스가 크고 법인의 매출 규모를 봐서도 합리적인 상황이라고 봐.


게슈탈트 심리학(형태심리학)이라고 들어봤지? 그래, "전체는 부분의 합과 다르다"라는 것을 전제로 출발한 심리학의 한 이론이야. 3명의 마케팅 담당자가 있다면? 맞아. 우리가 당연히 기대하는 건, 프랑스에 있는 마케팅 3명의 합(Performance)이 네덜란드에 있는 마케팅 담당자 1명보다는 적어도 같거나 많아야 한다는 거야.


그런데, 말입니다... 이 3명의 Performance가 네덜란드 1명보다 못하다면 믿으시겠습니까?


네덜란드 마케팅 담당자 1명은 디지털/ 오프라인/ 이벤트/ 프로모션 등 전부를 담당하며 바빠서 쩔쩔매며 일을 진행 하지만 그래도 일이 오히려 잘 진행되고 있어. 휴가를 갈 때나 부재중일 때는 백업을 준비하면서 말이야.


프랑스 법인의 경우에는 3명이 이를 나누어서 하는데 '시너지'보다는 '역시너지'가 나게 된 거지. 게슈탈트 심리학이 정확히 맞네. "전체는 부분의 합과 다. 르. 다" (크게 달라야 하는데, 작게 다르게 된 거지... 아쉽게도 말이야.)


개인주의가 강하다 보니, 마케팅 담당자 3명끼리 협의도 잘 안되고, 일정도 잘 안 맞고, 휴가는 일정 조율 없이 셋 다 가버리고. 이러니 미쳐 안 미쳐? (아, 결국 한국 사람만 미치게 되는거구나...^^)


한국 회사가 너무 한 것도 분명 있지만, 프랑스인이 너무 한 것도 분명 있다고 봐.

서두에서부터 계속 말하는 "문화적 관점의 차이"로 본다면 말이야.


3. 관용주의, 그리나 무관심


왠지 격이 있어 보이는 '톨레랑스'란 말.

개인적으로도 프랑스 사람들에 대한 좋은 점을 꼽으라면 바로 이 '관용주의'를 단연코 꼽게 되거든. 나도.


종교의 관용으로부터 시작된 이 사상은 현대에 이르러서까지 개인과 모든 것을 대상으로 적용되고 있어. 프랑스인들의 '관용'에 대한 엄청난 아량은 정치적 망명자들로 인해 파리 곳곳에서 폭탄 및 총기 테러가 빈번하게 일어나도 여전히 외국인에 대한 관용적인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는 것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고. 참 대단하지? 존경스럽기까지 해.


다만, 이 '관용주의'가 때로는 '좋은 게 좋다는 식'이나 '들어는 줄게. 다만 움직이진 않을 거다'라는 식으로 표출될 수 있다는 거야. 실제로 업무를 하다보면 그렇고.


앞서 합리주의에서 언급한 1) 번을 혹시 기억해? 프랑스인들과 일을 하려면 철저히 설득을 하고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거. 그래서 일단 뭐든 이야기를 하면 잘 들어주더라고.


언젠가는 업무 협의를 하는데, 나 스스로도 만족할 만큼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충분히 이야기를 잘했었던 적이 있었어. 그 자리에 있던 우리 프랑스 동료들은 다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지. 어렵게 드디어 이루어낸 성공이구나... 하고 미소를 지으며 돌아선 후 일주일 후에 내가 이야기하고 협의된 어느 하나도 실행이 되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어.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  그때는 왜 다 알아들은 것 같이,  협의된 것같이 보였는데 왜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는지... 또 다른 프랑스 친구가 이야기해줬어. (아마, 이 친구는 프랑스인의 이중성을 가진, 조금은 다른 친구 였던듯...) 그 친구들 톨레랑스로 들어주는 건 열심히 하는데, 아마 처음부터 네가 말하는 것에 관심도 없었고 함께 실천할 생각도 없었을 거라고.


그때, 그 당시의 뒤통수 맞은 충격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해.


이 너무 길어졌네.

여태까지 프랑스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했으니, 다음엔 우리를 함께 짚어봤으면 해.


우린, 지금 정반합으로 가고 있는 거야.

프랑스인에 대한 고찰과, 우리의 자화상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우리가 나아갈 길에 대해.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서로의 다른 관점으로 보면, 서로에 대해 '미쳤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거야.

또는 다른 관점을 서로 이해하고 나면 개선의 '접점'을 찾을 수 있겠지.


그게 내가 바라는 바이기도 하고.


[To be continued]




'견디는 힘' (견디기는 역동적인 나의 선택!)

'직장내공' (나를 지키고 성장시키며 일하기!)

'오늘도 출근을 해냅니다' (생각보다 더 대단한 나!)

'아들에게 보내는 인생 편지' (이 땅의 모든 젊음에게!)

'진짜 네덜란드 이야기' (알려지지 않은 네덜란드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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