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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Oct 18. 2017

흐바르(Hvar)가 나에게 천천히 가라고 말했다. #2

Polako! Polako! 천천히! 천천히!


- 여정 -


[Intro] 여행은 고단함이다.

암스테르담 To 독일 뒤셀도르프 (228km)

독일 뒤셀도르프 To 오스트리아 비엔나 (차 싣고 12시간 기차 이동, 침대칸 1박)

오스트리아 비엔나 To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373km)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To 크로아티아 플리체비체 (130km, 1박)

크로아티아 플리체비체 To 크로아티아 스플리트 (242km)

크로아티아 스플리트 To 크로아티아 흐바르 섬 (차 싣고 2시간 배 이동, 2박)

크로아티아 흐바르 섬 To 크로아티아 스플리트 (차 싣고 2시간 배 이동)

크로아티아 스플리트 To 크로아티아 자다르 (159km, 1박)

크로아티아 자다르 To 슬로베니아 피란 (381km, 1박)

슬로베니아 피란 To 슬로베니아 포스타냐 동굴 (75km)

슬로베니아 포스타냐 동굴 To 슬로베니아 블레드 호수 (105km)

슬로베니아 블레드 호수 To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400km, 1박)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To 독일 뒤셀도르프 (차 싣고 12시간 기차 이동, 침대칸 1박)

독일 뒤셀도르프 To 암스테르담 (228km)



Polako! Polako!
그래, 나는 지금까지 충분히 서둘러 살고 있었어.


60은 족히 넘어 보이는 할아버지가 갑자기 우리 차를 세웠다. 두 손을 하늘로 들었다 그것들을 가슴까지 내렸다를 반복하며. 그 손의 큰 움직임으로도 충분히 우리 차를 세울 수 있었지만, 그 할아버지는 기어코 우리 차 앞에서 길을 가로막았다. 조수석 쪽 창문으로 온 할아버지가 창문을 내려보란다. 창문을 좀 내리니 Polako, Polako라고 외치고는 잘 가라며 손을 흔들었다. 크로아티아 말을 잘 모르지만 그것은 분명 "천천히! 천천히!"라는 말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제야 난 정신을 차렸다. 날씨는 뜨거웠고 내비게이션은 먹통인 데다가 숙소로 들어가는 길은 좁았다. 일방통행도 아닌데 도로는 1차선이어서 자칫하면 차 두대가 마주 보다가 어느 한 명이 양보해야 지나갈 수 있는 길이었다. 후덥지근한 날씨와 먹통인 내비게이션은, 아무리 즐거운 여행을 왔다고 하더라도 짜증을 유발하는 충분한 조건이었고 마주오는 차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 액셀을 깊이 밟았던 것이다. 


그러고는 마침 그 좁은 길 초입에서 그 할아버지가 나의 차를 세운 것이다. 마치 그 길의 초입에서 들어오는 이방인을 모두 감시하는 터줏대감 같았다. 벗겨진 머리 푸근한 인상, 그리고 불뚝 나온 배와 함께. 차를 갑자기 세운 것이 의아했고 한소리 아닌 한소리 들은 것이 못내 기분 언짢았지만, 돌이켜보니 아주 잠시 이성을 잃고는 차를 험하게 몬 것이 사실이었다. 더불어 여행까지 와서 무언가를 서두르려고 했던 것 자체에 대한 경종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나는 충분히 서둘러 살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흐바르의(Hvar) 매력에 빠지다


흐바르 섬의 매력은 한적한 바다다. 아직은 그렇게 많이 알려져 있지도 않고, 스플리트로부터는 배를 타고 와야 하기 때문에 근접성이 떨어진다. 그래서 나는 잘 알려진 두브로브니크를 가지 않고 흐바르를 택했다. 여유가 철철 넘치는 여정이 아니었지만, 이곳에서 2박을 결심한 이유다. 

지난밤 10시가 훨씬 넘어 도착한 흐바르 섬은 암흑 그 자체였다. 간간이 들리는 파도소리가 이곳이 섬인 것을 상기시켜주고 있었다. 항구에서 차를 내려 20여분을 달렸다. 도착한 숙소는 바다를 마주한 아늑한 집이었지만, 늦은 밤이라 역시 바다는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소리만 흘렸다. 뜨거웠던 낮의 기억, 그리고 2시간여 배를 타고 늦게 도착한 우리 가족은 시원한 에어컨 아래에서 그렇게 잠을 청했다.


아침이 되어 창문 너머로는 곧바로 흐바르의 매력이 몰려왔다. 소리로만 들리던 바다는, 그 파란 빛깔을 여과 없이 내비치고 있었다. 마치 하늘과 누가 더 파란지 대결이라도 벌이는 것 같았다. 설렜다. 저 바다를 아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어서 좋았다. 역시나 아이들은 바다로 가자고 아우성이었다. 바다는 그렇게 누구든 즐겁게 만든다.

여정은 힘들었지만 흐바르의 매력이 그 고단함을 어루만져 주었다. 아침 식사를 기다리는 아이들.


조금 늦은 아침을 먹고는 바다로 향했다. 아이들에게 충분히 자외선 크림을 발라주고는 물놀이에 필요한 몇 가지를 주워 담아 길을 나섰다. 문을 열자마자 턱 하니 차고 오르는 후덥지근한 바람과, 보기에는 좋지만 살갗에 닿으면 뜨겁다 못해 따가운 햇살이 느껴졌다. 여름이라는 것을 잠시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자연의 노파심이 그렇게 여름을 더욱더 달아오르게 하고 있었다. 바다로 가는 길 길목 사이사이에 보이는 바다는 하늘과 맞닿아 파랗고 파랬다. 큰 바다를 골목 사이로 자그마하게 보는 것도 참 좋다. 소중한 걸 아껴서 보는 것 같다. 선물 포장을 풀러 가며 맞이하는 기쁨과 같이.

골목 사이로 보이는 바다가 참 좋다.


숙소 앞에는 작지만 한적하고 아름다운 해변이 있다. 모래가 아닌 자갈로 해변이 가득 매워져 있고, 물은 맑아서 물속의 자갈들도 물 밖의 것처럼 잘 보인다. 몇 유로 상당의 크로아티아 돈을 내고 우리는 나무 아래에 빌린 파라솔과 비치의자를 펼쳤다. 아이들은 이미 바다로 뛰어나간 뒤였다. 뜨거운 햇살과 차가운 바닷물의 조화에 흔쾌히 달려가지 못하는 우리와는 달랐다. 비치의자에 누워 잠시 잠깐의 휴식을 취했다. 그저 이러고 영원히 있고 싶다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났다. 아마 평생 이렇게 살라고 하면 당장은 그럴 수 있을 것 같아도, 머릿속으로는 또 다른 도전이나 탈출을 원할게 뻔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참 간사하다. 마음도 그렇고 생각도 그렇다. 


시간이 좀 지나고 와이프와 나는 번갈아 가며 아이들과 바다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역시나 물은 찼다. 더운 날씨를 생각하면 시원하다고 하는 것이 맞겠지만. 평소라면 모래를 가지고 놀았을 녀석들인데, 모래가 아닌 자갈이니 처음엔 좀 낯설어했다. 하지만 금세 마음에 드는 돌멩이를 하나둘 골라가며 저 나름대로 즐길거리를 찾았다. 물은 맑고, 하늘을 푸르고 아이들은 즐거워하는 모습에 모든 것이 좋았다. 흐바르에게 받은 선물이 마냥 좋았다.


오전이 지나갈 무렵, 허기를 느낀 우리는 숙소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해변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네덜란드의 물가보다는 저렴하지만, 현지 물가 치고는 비싼 식당들이 즐비했다. 마음을 고쳐먹고 네덜란드보다 싸다는 생각으로 감사하게 즐기기로 했다. 

해변 근처 식당. 덥지만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이 땀을 식혀줬다.


바다와 함께 한 식사는 즐겁고 맛있었다. 아이들도 빵과 해산물을 좋아했다. 배고픔도 한몫했겠지만, 커가는 녀석들의 먹는 양과 속도가 장난 아니다. 

식사를 마치고는 흐바르의 시내로 향했다. 입구에는 예상치 못한 안내판이 있었다. 해변 도시라 마냥 자유로울 줄 알았는데, 시내에서는 수영복을 입고 돌아다니거나 술 먹고 주위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면 벌금을 낼 수 있다는 경고판이 서있었다. 물론, 수영복을 입지 못하게 한다고는 하지만 관광객들의 옷차림은 여기저기에서 자유로움이 묻어났고 어떤 옷들은 수영복과 옷의 경계가 없는 것들도 있었다.


시내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 우리는 이미 흐바르의 열정에 압도되고 있었다. 흐바르의 뜨거운 열정은 우리 아이들로 하여금 연신 물을 찾게 했고, 아이스크림 한 번으로는 더 이상 돌아다닐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물론, 열심히 물놀이를 하고 온 탓도 있었다. 잠시 어느 한쪽에 자리를 잡고 쉬기로 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들락날락하는 배. 그리고 푸른 바다와 또 푸른 하늘까지. 시간은 어느새 해를 정상에서 끌어내려 바다 가까이까지 가게 했고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차로 향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그 숙소 근처 좁은 길의 초입에서, 터줏대감 할아버지를 만나 "천천히, 천천히"라는 말을 들은 것이다. 충분히 서둘러 살아온 내게 그 말은, 비단 자동차의 속도를 줄이라는 말로만 들리지 않았다. 다시 하늘을 보았을 때는 하늘의 푸르름이 점점 어둡게 짙어가고 있었다. 하늘과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바다도 그 색을 따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내 머릿속엔 그 할아버지의 외침이 반복되고 있었다.


"Polako! Polako!"


그렇게, 흐바르는 나에게 천천히 가라고 말했다.

서서히 어두워지는 하늘. 빨리 사는게 운명인 나라도, 가끔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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