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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Dec 14. 2017

직장생활과 루머의 상관관계

Part 3. 심리학으로 바라보는 직장생활 #11

말들이 참 많은 곳


Episode 1

대리에서 과장 진급을 앞에 두고 있던 때였다. 확률은 50%. 크게 뒤처지거나 잘못한 것은 없었다. 아주 확실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결격사유도 없었으니 속은 초조 하면서도 겉으로는 담담한 척을 했다. 발표가 나오기 하루 전, 한 후배 녀석이 잠깐 이야기를 하자고 하더니 끝내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 위로는 다음 날에 대한 것이었다. 끝내 나는 (나는 미리 알지 못했던) 진급 누락을 경험했다.


Episode 2

한 남자 후배 녀석이 사내에서 소문을 달고 다녔다. 다른 부서 여사원과 사귄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문제는 그 후배 녀석이 유부남이라는 거였다. 후배를 불러 물어보니, 아니란다. 실제로도 아니었다. 다만, 여사원이 사내 성희롱으로 고민하던 것을 들어주고 도와줬을 뿐인데 같이 다니던 모습이 포착되며 오해를 산 것이다. 거기다 여사원을 성희롱했던 가해자가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린 것도 한 몫했다. 오해가 풀려야 마땅하지만, 아직도 직장 내 몇몇의 사람들에겐 그 둘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고 각인되어 있다.


Episode 3

매년 연말, 11월 말쯤이 되면 직장 내 루머는 극에 달한다. 누가 승진을 할 것이며, 누구는 집에 가고, 내 위로는 어떤 상사가 온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시간이 갈수록 그것들은 구체화되고, 100%라는 장담까지 난무한다. 실제로 열린 뚜껑은 역시나 반반. 하지만, 꽤 들어맞는 것도 있으니 그저 루머로만 치부할 수가 없다. 알고 있던 '사실'이 인사라는 특성에 따라 갑자기 바뀌어 '루머'가 되는 부분도 있겠다. 반대로, '루머'였던 것들이 우연히 '사실'이 되는 경우도 있고.


직장은 참 말이 많은 곳이다.

내 이야기를 나보다 남이 먼저 알고, 아닌 것에 대한 소문도 자자하다. 누군가의 승진을 점치기도 하고, 요직에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들은, 어떠한 사실이 일어나기 전에 '말'로 태동한다. 위에 언급된 예시 말고도 사람 성격부터 외모, 업무 스타일과 그날 입고 온 옷에 대한 이야기까지, '말'들은 다양하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직장 생활을 한다는 것은 발가벗겨져 어느 한 무대에 올라선 것과 같다고. 아마, '나는 모르는 이야기'가 '나도 모르게' 퍼지고 들려오는 것에 대한 경험이 그것을 떠올리게 하지 않았나 싶다. 누군가 끊임없이 쳐다보는 느낌. 직장 생활을 하는 우리 자신은, 원하지 않아도 직장 내 시선에 심하게 '노출'되고 있는 것이다. '나'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도 그렇게 양산되고, 회자되고 있으며 널리 퍼지고 있다. 사실이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다. 그것과 관계없이 살아 움직이는 것이 루머기 때문이다.


'나'도 '남'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재미있으면서도 씁쓸한 사실은, 나도 '남'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에 동참하는 경우도 있고, 방관하는 경우도 있겠다. 때로는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그것을 양산하고 전파하려 한 적도 분명 있을 것이다. 수 없이 강조했지만, 직장은 (회사 가기 싫은)'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그리고 그 이면에 있는 다양한 욕구와 불안, 그리고 다양한 환경 속에서 자라온 각양각색의 성격들이 부딪치며 서로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직장인의 숙명이다.


술자리든 커피타임이든, 사람들이 모인 어느 곳에서도 '남' 이야기는 끊이질 않는다. 상사부터 시작해서, 동료나 후배 등. '그 사람 어때? 어떤 사람이야? 나는 이런 느낌이 들더라'라는 물꼬가 트이면 남에 대한 이야기는 끝을 모르고 시작된다. 알고 있는 이야기부터, 모르는 이야기까지 넘겨짚으며 사람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이때는 앞에서 언급한 각 사람들의 '이미지'가 난무하고, 각자의 주관적인 경험과 감정에 의해, '남'을 좋고 나쁜 사람으로 규정된다. 아마도 그것이 합의되고 규정되어야 대화는 끝이날 확률이 높다.


직장 생활에서 승진과 급여를 빼면 무엇이 남을까 생각해보자면, 그것은 아마도 '남 이야기'가 아닐까 한다.


루머가 만들어지는 이유,
그것을 전하는 사람들의 심리


직장에서 왜 이러한 루머가 난무하고, 우리는 남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자. 아마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사람이니까. 사람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은, 아니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이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한국사람'이라서, 그리고 '직장인'이라서 더 그러한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가 그러는 이유를 한 번 찬찬히 생각해보자.


1. 한국인의 집단 문화 그리고  '집단 무의식'


한국인이라면 우리의 역사를 잘 알 것이다. 삼면으로 둘러싸여 침략을 많이 받던 나라. 그래서 똘똘 뭉쳐 위기를 이겨냈어야 하는 나라. 이것이 '두레'와 '품앗이' 같은 아름다운 공동체 문화로 발전했다. 왜나라와의 전쟁, 일본으로부터의 독립 그리고 IMF 때 했던 금 모으기나 태안 기름유출 사건 때 많은 국민들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 돌 하나하나를 닦던 모습이 공동체 문화의 아름다운 전형이다.

다만, 이 아름다운 에너지를 쏟아부을 '대상'이 없거나 지나친 공동체 문화를 강요하면 '집단주의'가 발발한다. 내가 불행한데 너는 어떻게 행복할 수 있냐는 생각.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옛말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야근을 하고 있는데 나 혼자 퇴근하기란 한국 사회에서 영 쉬운 일이 아니다. 해외 생활을 하는 사람 중에는 일부러 한국사람 커뮤니티에 적극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 그곳에 발 담는 순간 너무 많은 말들이 오가고, 아무것도 안 하면 안 한다고 또 뭘 한다면 한다고 소리들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그 옛날엔 옆집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 아는 것이 미덕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융이 말한 바와 같이 이러한 집단주의라는 '집단 무의식'은 우리 마음과 문화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아무리 신세대라도,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더라고 해도 정도의 차이이지 내버릴 수 없는 속성이다. 한국 사람은 일을 너무 열심히 하니 유럽 사람들처럼 여름에 3주간 휴가를 다녀와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에는 모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런데 바쁜 와중에 내 바로 아래 후배가, "저 휴가 3주간 잘 다녀오겠습니다!"라고 말하면 당신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쿨하게 보내주긴 하겠지만, 마음에 남는 어쩔 수 없는 개운치 않음은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아니면 버럭 하거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한국을 벗어나 해외에 살더라도, 결국 한국 사람은 그 집단 무의식을 발현해 내고 만다.

우리는 집단에 속해있고, 그 집단에서 조금이라도 튀면 그 사람에 대해 말을 한다. 아니, 덜 튀어도 이야기하고 보통이어도 이야기하고, 잘나도 못나도 이야기한다.


2. '내가 정보통이라는 과시' 또는 '어색한 대화를 피하기 위한 수단'


술자리에서 모든 이의 이목을 끌며 대화를 이끄는 선배가 있다. 그 선배는 술도 잘 마실 뿐만 아니라, 술자리에서의 (소위 말하는) Talking share를 50% 이상 차지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지겨워하지 않는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그 선배의 이야기에 빠져든다. 왜 그럴까? 그 선배는 '남 이야기'를 주로 하기 때문이다.

"그거 알아?", "몰랐어?", "나는 알아. 이야기해줄까?" 등.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루머를 들었을 때 그 선배에게 달려가 진위 여부를 확인할 정도다. 그 선배는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하나 모일 때마다 더 신나서 말을 이어간다. 물론, 맞는 말도 있고 아닌 부분도 상당하다. 가끔은 정말 알고 있는 사실 이상의 것들까지 거침없이 내뱉곤 하는데, 확실히 그 선배는 자신이 '정보통'이라는 사람들의 인정을 즐기는 듯했다. 사람들로부터 '안테나가 대단하다'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고 자랑삼아 이야기하곤 했으니. 직장 내에서 사람들(상사를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무엇으로 든 간에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상당히 매력적인 일이라는 걸 부정할 순 없으니 충분히 이해가 되기도 한다.

더불어 '남 이야기'는 어색한 대화를 타계하는 수단으로 쓰이기도 한다. 직장에서는 원치 않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 인사를 하기에도 안 하기에도 애매한 사람과 대화를 이어가야 할 때가 있다. 그런 경우 사람들은 보통, "아 누구 아세요? 그 부서에 그 친구가 제 동기예요"라며 이야기를 꺼내곤 한다. 어떻게든 연결을 지으려는 경우. 또 어떤 경우는 "저희가 자주 연락하는 그 부서에 그 사람 어떻게 생각하세요? 사람 참 괜찮은 것 같더라고요."라며 3자에 대한 의견을 묻기도 한다. 서로에 대한 어색한 대화는 단조로운 질문으로 이어져 가지만, 남 이야기가 시작되면 보다 더 자연스러운 상황을 이어갈 수 있게 된다. 그러다 친해지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3. '내 편이 되어달라'는 무언의 압력(정치적 의도) 그리고 '동조'


마케팅 부서에 있는 차장 직급의 A는 사람들을 무척 가린다. 자신의 편인지 아닌지를 명확하게 해서 인맥 지도를 그리는 사람인데, 그 사람이 '자신의 편'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방법은 바로 누군가 앞에서 남의 이야기를 하고 그 '반응'을 보는 것이다. 즉, 친해지고자 하는 사람에게 접근해서 (함께 아는) 제삼자에 대한 험담을 하고 그것에 맞장구를 치면 자기편이 되고, 시큰둥한 사람은 멀리하는 방법이다. 나 또한 A 차장의 인맥 지도에 들지 못했는데, 돌이켜보니 2년 전 밥을 사주겠다며 접근한 A 차장의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것이었다.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에 열변을 토하던 A 차장에게 그리 큰 반응을 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이와 궤를 같이하여 어떤 사람들은 정치적 의도로 남 이야기를 한다. 심한 경우는 없는 이야기까지 만들어 누군가를 험담하기도 한다.

이와 함께 '동조' 현상도 남 이야기하는 것에 휩쓸릴 수밖에 없는 우리 모습을 설명해준다. 특히 집단주의가 강한 우리에게는 이 '동조'가 생각보다 무섭게 작용한다. 대학교 3학년 사회 심리학 시간에 교수님께서 한 가지 실험을 하자고 하셨다. 바로 전공 서적에 나오던 '동조'현상. 지각해서 늦게 오는 학생들을 타겟으로 우리는 사전 모의를 실시했다. (이미 수업에 들어와 있던)세 명을 나란히 앉히고, 지각한 학생 한 명을 네 번째 앉혀 한자 '言(말씀 언)'자를 보여주고 앞에 세 사람이 연속으로 이것을 '靑(푸를 청)'으로 읽으면 마지막 학생은 이를 '푸를 청'으로 대답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우리의 가설이었다. 결과는 역시나, 주저하던 네 번째 학생은 그것을 '푸를 청'으로 읽었다. 사전 모의에 가담하지 못한 학생 5명 중 3명이 누가 봐도 '말씀 언'자를 '푸를 청'으로 답하는 놀라운 실험이었다. 나중에 속은 학생들에게 왜 그랬냐고 물었더니 다르게 말하면 자신만 바보가 된다거나, 앞에 사람들이 말한 것과 다르게 이야기하면 이상하게 보일 것 같은 불안감을 느꼈다고 했다. 만약 직장 내 어느 술자리나 모임에서, 당신 말고 세 명의 사람이 B라는 사람에 대해 험담을 하고 당신에게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다른 사람들이 '남 이야기'에 열중해 있을 때, '남 이야기'는 그만 하시죠라고 제지할 수 있는가?





생각보다 큰 영향은 없다
그리고 뻔뻔해질 필요가 있다


이처럼 직장은 말이 참 많은 곳이다. 벌거벗겨진 기분.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꺼림칙함. 나도 모르는 이야기가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져 오는 불쾌함까지. 이것이 심해지면 공황장애나 신경증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가볍게는 직장인에게 익숙한 슬럼프 정도로 올 수도 있고, 건강을 해칠 정도의 신체적 증상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겠다. 하지만 직장 생활을 십수 년 해보니 이러한 루머들이 나 자신에게는 그리 큰 영향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을 확대하고 마음을 짓누르는 것은 나의 '망상'과 '불안'이었다는 것도. 사람들은 남 이야기를 아주 쉽게 한다. 그저 안주거리처럼 말이다. 그러고는 쉽게 잊는다.


미국 코넬대 사회 심리학자인 토머스 길로비치는 '조명 효과'라는 이론으로 이를 잘 설명했다. 한 학생에게 왕년의 스타 얼굴이 인쇄된 티셔츠를 입히고 다른 실험 참가자들이 있는 방에 잠깐 앉아 있다가 나오라고 했다. 젊은 학생과 영 어울리지 않는 그 왕년의 스타 얼굴이 많은 사람의 이목을 끌 것이라 예상한 것이다. 실험이 종료된 후 그 학생이 입었던 옷에 무엇이 인쇄되어 있는지를 기억한 학생은 23%에 불과했다. 이처럼, 다른 사람들이 내 모습과 행동에 주목할 것이라고 과장하여 생각하는 것을,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무대 위의 주인공에 빗대어 '조명 효과'라 이름 붙인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좀 뻔뻔할 필요가 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내가 모르는 이야기나, 나에 대한 이야기. 어쩌면 불쾌할 수도 있는 이야기에 대해 그리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 것이 좋다.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람의 감정이란 게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 그래도 연습해야 한다. 이는 귀를 닫고 살자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말 중에서, 나를 돌아봐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내가 받아들여보고 맞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받아들여 반성하고 개선하려 노력하면 된다. 그리고 얼토당토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뻔뻔해지자. 전혀 압도될 필요가 없다.

다시, 사람들은 남 이야기를 쉽게 하고, 그것이 내게 주는 영향은 없다. 그리고 나에게 그렇게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한 번 생각해보자. 어제 동료들이 입었던 옷이 세세히 다 기억나는가? 누군가 하고 온 귀걸이가 네모였는지 세모였는지 기억하는가? 후배의 구두 색깔이 검은색이었는가, 아니면 갈색이었는가? 어쩌면 가족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는 직장 동료들에 대한 관심이 그 정도라니. 참 재밌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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