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테르담 Mar 19. 2018

내 정체성은 내가 챙겨야 한다!

Part 3. 심리학으로 바라보는 직장생활 #18

 정체성은 규정할 수 없다


내가 심리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했던 건, 바로 나 자신을 알고 싶어서였다.

도통 모르겠는 나 자신을 '규정'하고 싶었던 것이다. 모호하고 요동하는 나 자신을 어떻게든 '규정'하고 나면 세상 살아가는 것이 좀 더 수월할 것 같았다. '심리학'이라는 단어는 나에게 답을 찾을 수 있는 희망으로 다가다. 아니, 내가 심리학을 그렇게 받아들였것이다.


하지만 심리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사회에 발을 내디뎌 고군분투하면 할수록, '정체성'은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정체성'은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람은 한 가지 정체성으로는 살아갈 수 없고, 만에  하나 그것을 '규정'했다고 쳐도 정체성은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이다. 정체성을 '규정'하고 '고정'한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박제'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직장인이 되어 맞이하는 정체성에 대한 혼란은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상상 이상이자, 청소년기의 모라토리엄을 능가한다. 그런데 어쩐지, 그때보다는 명료해지는 느낌이다. 청소년기에는 성숙한 육체지만 제 역할을 유예하며 맞이하는 안갯속과 같은 방황이다. 반면, 직장인의 정체성 혼란은 먹고사는 것, 그리고 생존과 결부되어 방향성이 비교적 명확하다. '직장인'이라는 '정체성'을 기반으로 힘들어하고 있는 것이다. '직장인'은 우리 삶에 있어서 가장 명확한 '정체성'중 하나라 볼 수 있다. 다만, 우리는 '직장인'으로서의 삶이 고달프고, 억지로 해야 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그저 그것을 부정하고 회피하려는데 온 힘을 쏟는다. 그래서 더 힘든 것이다.


'직장인'이라는 '정체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정체성'에 대한 환상이 있다.

'정체성'이 확고하다는 것은 '나 자신'이 어떠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 줄 수 있고, 그 '정체성'에 기반한 신념으로 세상을 살아나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체성'은 '고상하거나 고귀한 것'이라야 한다는 환상. '나 자신'은 멋진 사람이고 싶고, 세상사에 요동하지 않는 자존감 높은 사람이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이 그렇게 녹록한가. 더더군다나 '직장인'으로서 맞이하는 하루에 열두 번도 넘는 감정의 기복 속에서 우리의 '정체성'은 롤러코스터를 타고 만다. 어려서부터 저는 장래 희망이 '월급 받는 직장인입니다'라고 천명한 사람이 있을까? 야근하고 싶어 안달하고, 직장 상사에게 소위 말하는 '닦이는 상황'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자라온 사람이 있을까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고귀한 '정체성'이라는 단어에 '직장인'이라는 것을 결부시키길 꺼려한다. '직장인'으로서 살아가고 있음에도 말이다.


우리는 수많은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누군가의 부모로서, 애인으로서, 가족으로서, 동호회 리더로서, 사업가로서, 어느 민족으로서, 유권자로서 그리고 직장인으로서. '나'라는 정체성은 이 모든 것 이상의 '합'이다. 그런데 당장 먹고살아야 하는 존재로서, 어쩐지 '직장인'이라는 가면의 크기와 무게가 가장 커 보인다. 그러니 그것을 부정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스스로를 힘들게 하는 일이자, 정체성의 혼돈을 자초하는 일이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심리적 안녕감'과 '타인의 인정' 사이


앞서 우리는 '마르시아'의 이론으로 직장인의 정체성을 살펴보았다. '관여'와 '위기'에 대한 경험의 정도에 따라 정체감의 상황을 보여주었다. 이를 좀 더 응용하여 '심리적 안녕감'과 '타인의 인정'이라는 측면에서, '직장인'이라는 자신을 살펴보자.


첫째, 직장인으로서 '마음이 편하고', '남이 나를 인정' 해주는 경우


우리가 바라는 이상향이다. 여기에 위치해 있다면 '정체성'으로 방황할 일이 거의 없다.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 직장 생활을 아주 즐겁게 해나갈 가능성이 높다. 또는 성과를 많이 내지 못하더라도 조급해하지 않고, 주위 사람들과 조화롭게 보낼 것이다. 스트레스도 이 사람을 어찌할 수는 없다.


둘째, 직장인으로서 '마음은 불편하고', '남이 나를 인정' 해주는 경우


아마, 꽤 많은 직장인들이 여기에 속해 있을 것이다. '직장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괴로운데 어느 정도 성과는 나온다. 남이 나를 인정해주니 어찌 되었건 열심히 한다. 다른 사람들은 나에게 직장인 체질이라고 하지만 스스로는 괴롭다. 차라리 인정받지 못하면 모든 미련을 버리겠지만, 힘들어하면서도 또 어려운 프로젝트를 맡아 무대 위에 선다.


셋째, 직장인으로서 '마음은 편하고', '남이 나를 인정' 안 해주는 경우


이런 경우라면 개성이 아주 강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또는 '독불장군' 유형도 여기에 속한다. 남이야 나를 인정하든 말든, 상대가 불편하든 말든 나하나만 편하면 된다. 남의 시선 따윈 중요하지 않다. 남을 배려할 바에야, 자신을 한 번 더 챙긴다. '자기애'가 지나치다. 아, 낙하산으로 내려왔거나 (능력은 없는) 오너 일가 중 한 사람이라는 예외적인 경우도 있겠다.


넷째, 직장인으로서 '마음도 불편하고', '남이 나를 인정' 안 해주는 경우


별도의 설명을 하지 않아도 어떤 상태인지 잘 알 것이다. 이건 개인과 회사 둘 다에게 재앙이다. 진로를 다시 생각해보거나, 스스로 변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마음에 병이 생기거나, 회사 업무가 마비될 것이다.




사실, 이 네 가지 타입이 어떤 특정인을 지칭하진 않는다. 알고 보면 우리는 이 네 가지 유형을 시시 때때로 겪고 있다. 즉, 우리는 이 네 가지 '정체성 상태'에서 돌고 돈다는 말이다. 그래서 '정체성'은 규정할 수 없고,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다. 어떤 상태에서 오래 머무느냐, 짧게 머무느냐의 차이이지 우리는 그렇게 돌고 돈다.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고찰


그래서 우리는 시시때때로 우리의 정체성은 어떤 상황인지를 살펴야 한다.

자동차의 외관을 보자. 누군가 내 차를 박고 도망갔다면 흔적이 남을 것이다. 운전석에 앉으면 온갖 경고등이 나에게 신호를 보낸다. 전자식 신호가 없더라도 운전하는 느낌이 이상하거나, 어디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를 듣고도 차에 이상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차린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마음에 그렇게 귀 기울여본 적 있는가?

'직장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직장인으로서의 내가 될까'를 고민한 적이 있는가?


당장 세차를 하고, 주유를 하고, 경고등이 들어오면 즉각 수리를 하고, 엔진 때까지 빼기 위해 자동차에 약을 먹이는 동안 말이다.


글쓰기와 독서, 그리고 명상 등은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잘 알려진 방법들이다. 물론,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이러한 방법을 하기도 전에 쓰러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분명, 자신을 돌아보는 것은 물질적인 어떤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값어치가 있다. 그래서 자신을 좀 더 면밀하게 볼 수 있는 심리학적 방법에 대해 언급하려 한다. 이것 또한 마찬가지다. 바빠서 못할 수도 있지만, 언젠가 한 번은 꼭 해보길 권유한다.


1.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나와 타인을 이해한다. "내관법"


내관법(內觀法)은 말 그대로 안을 들여다보는 방법이다. 자신의 심리 상태를 스스로 관찰하거나 다른 사람의 자기 관찰을 이용하는 심리학 연구 방법 중 하나다. 현대 심리학의 창시자인 '분트'는 의식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구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보고, '내관법'을 활성화하자고 주장했다.


배고픈 사람이 앞에 놓인 빵을 집어 먹고 있다. 왜 저 사람은 빵을 먹게 되었는가에 대한 질문은 어리석을 정도로 쉽다. 하지만, 당신은 그에 대한 대답을 어떻게 생각해 내었는가? 배고프니까 먹었을 것이란 걸, 그 사람의 마음에 들어가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바로, 나의 마음과 경험을 들여다봤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지난 과거의 우리가 한 행동들이나 반응 들에 대해 그 속내를 들여다보는 '내관법'을 활용할 수 있다. 과거의 '나'는 지금의 '나'와 다르다. 과거의 '나'를 '내관법'으로 바라보면, 타인을 바라보는 것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과거의 '나'가 느낀 감정이나 심리를 기억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상대방의 행동이나 반응을 이해하는데 아주 많은 도움을 준다. 내가 맞이 했던, 당했던, 경험했던 일들을 돌이켜보면 상대방도 같은 사람으로서 느끼는 본질적인 심리는 비슷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내관법'은 때와 장소를 가릴 필요가 없다. 길을 걸을 때나 지하철이나 버스, 자가용을 운전하고 갈 때도 시시각각 자신의 마음과 기억에 정신을 집중하면 된다. 불쾌한 기억이나 감정이라도 회피하지 말고 귀를 기울여야 한다. 타인의 불친절한 반응에 대해서도 기분 나빠하지만 말고 스스로의 마음에 대입하여 그 상황 전후를 모두 살펴보면 분명 깨달음이 있을 것이다.


2.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보는 '나', "메타인지"


'메타 인지'는 70년대 심리학자 존 플라벨에 의해 만들어진 용어로, 자신의 인지 과정에 대하여 한 차원 높은 시각으로 관찰/ 발견/ 통제하는 정신 작용을 말한다. 즉, 자신의 생각에 대해 판단하는 능력이다. 메타인지는 인류의 발전과 생존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스스로의 한계를 인지하고, 그것을 뛰어넘기 위해 노력해왔기 때문이다.


우리 눈 앞에 자장면 다섯 그릇이 있다. 이것을 다 먹을 수 있냐고 물어보면, 보통 성인의 경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것이다. 하지만 3~4살 어린아이에게 같은 질문을 하면 어떤 어린이는 다 먹을 거라고 호언장담한다. 실제 심리학 '기억 실험'에서도 성인들은 자신이 외웠다고 말한 단어의 수와 비슷한 정답률을 보인 반면, 아이들은 분명 외웠다고 말했지만 그 오답률이 성인보다 높았다. 즉, 메타인지 능력은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해가며 점점 더 현실화된다. 물론, 메타인지 능력이 마냥 좋기만 하다고는 할 수 없다. 메타인지 능력이 떨어지는 아이들이 어른들보다 더 큰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고, 치매 노인이 자신이 치매가 걸린 것을 '메타인지'하는 순간 그 고통은 더 크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건, 메타인지는 자신의 한계를 알아보고 한 걸음 떨어져서 그리고 한 차원 높은 곳에서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우리는 타인의 정체성은 상당히 잘 정의한다.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이야, 원래 저래!"라는 말로 상대방을 규정한다. 그리고는 자신이 알고 있던 것과 다를 경우 매우 놀란다. 자신은 더 다양한 '정체성'과 자신도 모르는 수많은 행동과 반응을 내보이면서 말이다. 타인의 정체성을 쉽사리 판단하는 것이 그리 좋은 건 아니지만, 명쾌하게 그 정체성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주목할만하다. 그것은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보기에 가능한 것이다. 자신을 '메타인지'해봐야 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직장인으로서 내가 가진 능력과 역량,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의 구분. 그리고 어떠한 상황에서 느낀 심리와 감정들. 자신의 한계와 가능성, 그리고 마음의 안녕감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알아차려야 한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 행동하고 받아들이고 대처할 것인지에 대해 스스로와 상의하면, 매우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신의 '정체성'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는다.

그것은 어디 가서 배울 성질의 것이 아니다. 스스로 관찰하고 깨우쳐야 한다. 그리고 '규정'하려 들지 말고 '받아' 들여야 한다. 다양한 '정체성'을 가졌음을 인정하고, 시시각각 변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수시로 그것들을 관찰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아마, 우리는 이러한 '정체성'알아 가기를 평생 하게 될 것이다. 이 세상과 작별을 고하는 그날까지도 우리의 '정체성'은 하나로 귀결되지 않고, 수시로 변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 그전에 먼저. 자신이 '직장인'이라면, '직장인'이 자신의 주된 '정체성'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자신의 '정체성'이 뭔지 잘 모르겠다고 할 때는 지난 것 같다.




[종합 정보]

스테르담 저서, 강의, 프로젝트


[신간 안내] '무질서한 삶의 추세를 바꾸는, 생산자의 법칙'

[신간 안내] '퇴근하며 한 줄씩 씁니다'


[소통채널]

스테르담 인스타그램 

매거진의 이전글 직장, 비이성과 비합리성이 가득한 곳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