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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Dec 28. 2017

직장, 비이성과 비합리성이 가득한 곳

Part 3. 심리학으로 바라보는 직장생활 #12

'아돌프 아이히만'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물론, 자상한 한 가정의 가장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히틀러의 악명 높은 '최후 해결책(Final Solution)'의 충실한 집행자로서 나치의 선봉장 역할을 했다. 즉, 600만 유대인 학살의 주범이었다. 훗날 그가 재판장에 섰을 때 그의 변명은 의외로 간단했다. "상부에서 지시해서 어쩔 수 없었다."는 말과 함께, 그는 1962년 6월 1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알베르트 슈페어' 또한 평범한 것은 물론 매우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건축가로서 히틀러에의 눈에 띄어 마음껏 실력 발휘를 했다. 1934년 나치의 뉘른베르크 전당대회는 그가 연출한 대표적 작품(?)이다. 하지만 그가 더 이상 건축가가 아닌 군수 장관이 되었을 때, 그는 이미 나치 지도부의 비합리성에 편승을 하고 난 뒤였다. 전쟁에 대한 참상과 자신이 저지른 일을 인식하는듯했지만, 그 순간에도 그는 정치적 욕망에 사로잡았던 전범에 지나지 않았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작금의 국정농단은 누가 봐도 이성적이지 않다.
비합리성에 대한 분노는 극에 달아, 사람들을 결국 광장으로 모이게 한 사건. 그 주범들이 배울만큼 배우고 가진 만큼 가진 사람들 이라는 것이 분노를 더했다. 초일류 기업의 임원들, 그리고 정부 고위직 관계자들은 왜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것들에 묵인하고 편승했을까? 한 개인으로 보면, 사리분별을 할 수 있는 이성과 합리성으로 무장되었기에 그 위치에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텐데 말이다. 결국 그들이 뱉어내고 있는 말들은 위에서 언급한 "상부에서 지시해서 어쩔 수 없었다."라는 말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더불어, 그 지시를 따르며 바랐던 (개인이든 조직을 위한 것이든) 합목적성과 어떠한 욕망이 있었다는 것은 (당사자는 부인하지만)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직장은 이성적인 곳이 절대 아니다


직장인이 하는 가장 큰 착각은 직장에서 나는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회사가 나를 위해 있다는 그것이다. 전혀 그렇지 않다. 회사는 나를 위해 존재하지 않고, 나를 존중해주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지도 않다. 되지도 않는 기대를 하며 우리는 직장에서 그렇게 많이 상처받는다. 아마, 이것이 우리네 직장생활이 힘든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그것을 깨달아도 힘든데, 깨닫지 못한 상황에서 마주하는 상황들이 얼마나 마음 아플까.


그리고 또 하나. 직장은 절대 '이성적으로 돌아가는 곳'이 아니다.

그것에서 오는 충격은 상당하다. 배울만큼 배우고, 학창 시절에는 뭔가 크게 하나라도 했을 사람들이 모인 직장이라는 곳은 이상하리만큼 '이성'적이지가 않다. 우리가 그것에 큰 기대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회사에 발을 갓 들여놨을 때, 그리고 연차가 쌓이며 조금씩 회사에 대한 눈이 떠질 때쯤엔 모르던 것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한다. 남을 짓밟고 올라서는 사람, 실력은 없는데 (소위 말해) '광'을 잘 팔아 살아남는 사람,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것들을 삶의 철칙인 마냥 막무가내로 밀고 나가는 사람, 자신의 안위와 목표를 위해 회사는 물론 남은 신경도 쓰지 않는 사람 등.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이 직장 내에서 승승장구하는 아이러니는 도대체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다. 그러니 이성적으로 행동하고 합리적으로 판단하다가 받은 상처와 난처함은 상상을 불허한다. 제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오히려 힘들어지는 곳이 직장 일지 모른다.

(아, 물론 자신은 제정신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은 많다. 이 글을 마주하는 우리도 그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복종' 그리고 각자가 가진 '욕망의 교차점'


이성과 합리성이 쉽사리 무너지는 직장에 대한 고찰을 하기 전에, 도입부로 돌아가 보자. 다행히 심리학에선 서두에 언급한 비합리성을 규명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밀그램 실험 (Milgram experiment)'은 이것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실험으로 유명하다. '스탠리 밀그램 (Stanley Milgram)'은 실제로 상부의 지시로 어쩔 수 없었다는 '아돌프 아이히만'의 진술에 의문을 품고, 어떻게 그런 평범한 사람이 명령 하나 때문에 학살자가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연구했다. '명령'이라는 권위가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연구의 결과가 바로 '밀그램 실험'인 것이다.


밀그램 실험 (Milgram experiment)


- 1961년 스탠리 밀그램이 실시한 '권위에 대한 복종' 실험.

- 가설
사람들이 파괴적인 권위에 굴복하는 이유가 성격보다 상황에 있다고 보고, 굉장히 설득력 있는 상황이 생기면 아무리 이성적인 사람이라도 윤리적, 도덕적인 규칙을 무시하고 명령에 따라 잔혹한 행위를 저지를 수 있다는 주장

- 실험 방법
'징벌에 의한 학습 효과'를 측정하는 실험에 참여할 사람들을 모집하고 피실험자들을 선생과 학생으로 나누었다. 선생 역할과 학생 역할의 피실험자를 각각 1명씩 그룹을 지어 실험을 실시했다. 학생 역할의 피실험자를 의자에 묶고 양쪽에 전기 충격 장치를 연결, 선생 역할의 피실험자는 문제를 내고 학생이 틀리면 전기 충격을 가할 수 있도록 했다. 틀린 문제에 대해 전기 충격을 줄 수 있는 권한은 '실험자'에 의해 주어졌다. 그러나 사실, 학생 역할의 피실험자는 배우였고 전기 충격 장치도 가짜였다. 모두가 '실험자'에 의해 계획된, 선생 역할의 피실험자만이 모르고 있던 '권위에 대한 복종' 실험이었던 것이다.

- 결과
과연 고작 4달러의 대가로 선생 역할을 맡은 피실험자들은 어느 정도까지의 전기 충격을 가했을까? 실험자는 선생 역할의 피실험자에게 학생이 틀릴 때마다 15 볼트에서 450 볼트까지 전압을 높일 것을 지시했고, 실험자는 흰색 가운을 입고 전압을 올릴지 말지 고민하는 피실험자에게 '실험의 모든 책임은 자신이 진다'며 그것을 강요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사람 목숨이 위험한 450 볼트까지 전압을 올리는 사람이 0.1% 일 거라는 밀그램의 예상과는 달리, 65%의 피실험자가 450 볼트까지 전압을 올렸다. 그들에게 어떻게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전압을 올렸냐는 물음에 "실험자가 괜찮다고 했습니다. 그는 모두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말했어요."라고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아돌프 아이히만이 전범 재판에서 대답하는 모습이 곧바로 떠올려질 정도다.

밀그램 실험의 결과가 충격적이긴 하지만, 그의 가설이 나의 뇌리에 더 선명히 남아있다. 권위에 대한 복종은 '성격'이 아닌 '상황'이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조차도 어떠한 일이라도 벌일 수 있다는 것. 이것은 직장 내에서 벌어지는 일은 물론, 역사적으로 비이성적이었던 많은 사건들을 설명해 내고 만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있을까? 그리고 우리라고 그러지 말란 법이 있을까?


직장 내 비이성과 비합리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자, 그렇다면 우리 직장 내로 시선을 옮겨보자. 직장은 매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듯 보인다. 보고서 하나를 작성하더라도 앞뒤가 맞아야 하고, 글의 흐름이 있어야 한다. 즉, 논리적이어야 하고 사실(fact)에 기반한 증빙도 있어야 한다. 논리가 뒷받침되지 않은 설득이나 보고는 쓰레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논리적이라고 해서 그것이 무조건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국정 농단 사태에 연루된 사람들의 예를 보자. 초일류 기업의 임원은 아마도 '논리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 순간에 어떠한 지원을 한다면 회사를 위하는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지원할지에 대해서도 아주 '논리적'으로 고민했을 가능성이 크다. 나중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대비책으로 말이다. 그래서 그의 논리가 100% 맞았다고 치자. 하지만, 결과는 어떠한가. 결과적으로 그것은 세상의 지탄을 받아 마땅한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일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일들을 수행한 사람들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상부의 지시라서 어쩔 수 없이 했다"라며 아돌프 아이히만처럼 말하고 있는 중이다. 그 일을 수행할 때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했을지라도, 결국 그것을 거역한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직장인 주위에 만연한 비이성과 비합리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들은 왜 그럴까? 직장은 왜 그런 곳일 수밖에 없을까?


첫째, 직장은 Top-down의 피라미드 구조다.


즉, 복종이 기본인 구조다. 요즘은 직원들의 의견을 많이 듣고 배려하는 Bottom-up 구조를 확장해 가는 곳도 많지만, 회사는 태생이 피라미드 구조다. 그 안에서 발생하는 '지시'와 '복종'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회사를 굴리는 메커니즘인 것이다. 그리고 복종에 따른 대가로 직장인은 '인정'과 '승진'을 얻는다. 직장생활에서 그 둘을 빼면 남는 게 없을 정도다. 그러니 직장인은 오늘도 복종한다. 요즘엔 수평문화도 많이 거론되고, 무조건적인 복종을 지양하자는 회사들도 있지만 정도의 차이이지 그 근본이 바뀔 수는 없는 일이다. 복종으로 인한 비합리성은 이미 밀그램의 실험으로 살펴보았으니 더 이상의 설명은 하지 않아도 되겠다.


둘째, 직장은 KPI(Key performance indicator)와 시스템으로 유지되는 곳이다.


직장에서의 '인정'은 '정량적'인 것과 '정성적'인 것으로 구분된다. 사람들에게 평판이 좋은 것이 '정성적'인 것이라면, 숫자로 나타낼 수 있는 성과는 '정량적'인 것이다. 직장에서는 '정량적'인 것이 우선인 경우가 많다. 아무리 정성적으로 인정을 받는다 해도, 정량적인 성과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승진에 제약을 받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반대로, 평판이 좋지 않아도 정량적인 성과를 낸 사람 중에는 높은 자리를 꿰차고 있는 사람이 많다.

KPI는 바로 정량적인 성과 지표다. 직장 내 각 조직과 개인은 이 KPI를 가지고 있고 이를 통해 평가받는다. 그러니 각 조직과 개인은 KPI에 민감하다. 나의 KPI를 위한 일이 상대방에겐 반대의 일이 될 수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고, 실제로 회사는 이를 활용하여 조직과 개인을 긴장시킨다. 달리 말하면, 나에겐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이 상대방에겐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앞에 열거한 비이성과 비합리성의 두 가지 이유에 대한 예를 보자. 실제로 내가 일하는 직장 내에서 일어난 일이다.

한 팀장이 있다.
그는 사업부장으로부터 손익을 개선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리고 그는 손익이 좋지 않은 모델의 공급을 중단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제품 공급이 일방적으로 끊기면 거래선과의 신뢰가 깨지고, 물량이 뒷받침되지 않으니 손익은 더욱 악화될 것이라고 항의했다. 결국, 사업은 전년 대비 반토막이 났고, 손익은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고 말았다.
그러는 동안 그 팀장은 요지부동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항의에 그저 "사업부장님이 지시하신 일입니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더불어 그는 자신의 KPI에만 몰두했다. 단기적으로 반짝 개선되었던 손익을 자신의 성과라고 내세울 뿐, 더욱 악화된 회사의 상황은 안중에도 없었다.


셋째, 범죄의 합리성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미국 시카고대학교 게리 베커 (Gary Becker) 교수는 범죄 행위를 경제학 이론으로 설명했다. 범죄자는 자신의 이익이 극대화되도록 행동한다고 가정했고 범죄 행위도 결국 손익계산의 결과라 보았다. 범죄의 기대이익은 금전적 이익이나 심리적 보상이고, 범죄 기대비용은 체포 가능성이나 형벌의 크기라 보았을 때 범죄자는 그 순간의 '합리적' 선택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합리성은 '객관적'이 아닌 '주관적' 합리성으로 해석된다. 즉, 나의 합리가 다른 사람에게도 합리적인 건 아니라는 말이다. 상사의 지시에 따른 복종, 그리고 KPI를 지키려는 주관적 합리성은 그 순간 그것이 옳다고 믿게 만든다.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게 된다. 앞서 밀그램이 말한 비이성적인 판단은 성격이 아닌 상황에서 온다는 생각과 상통한다.




사람은 이기적인 동물이다. 모두 자신의 안녕과 번영에 사활을 건다. 자신의 안녕과 번영은 다른 사람에겐 불안과 위협이 될 수도 있다. 각각의 욕구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직장 내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서로 아웅다웅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직장은 KPI와 시스템, 피라미드 구조로 운영되는 곳이다. 개인의 성격, 욕구불만, 기업의 생존과 개인의 생존, 이익과 효율성 추구는 혼잡한 직장생활의 원형이다. 그러니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일들이 난무한다.


직장은 집단이다. 매슬로의 욕구단계 중, 사람은 누구나 '집단'에 소속되길 원한다. 그리고 집단에 소속되었다면 그 구성원에 '동조'하는 현상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두 가지도 모두 앞서 사람 공부와 루머/ 평판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살펴본 것들이다. 다시 한번 더 직장이 돌아가는 구조를 살펴보자. 그리고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것들이 왜 발생했는지를 돌아보자.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고 낙심하거나 불쾌해 하지도 말자.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정신 건강에 더 좋고, 오히려 미리 무언가를 대비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나는 물론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나의 이성과 합리가 다른 사람에게도 통용되는가.  조직 또는 타인으로부터 오는 비이성과 비합리에 대해 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가치가 있다. 똑똑한 사람들이 상부의 지시에 무기력하게 복종하진 않아 보인다. 그들에게는 욕망이 있었다. 그 욕망이 인정받는 것이든, 물질적인 보상이든, 혁혁한 공을 세우고 싶은 것이었든 간에 말이다. 우리가 같은 상황에 놓였을 때,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우리가 맞이하는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일들은 알고 보면 각각의 이기적인 욕망이 교차하는 지점일지도 모른다.


P.S


밀그램 실험을 원숭이에게 했을 때의 결과 또한 놀라웠다. 버튼을 누르면 먹이가 나오게, 동시에 학생 역할의 원숭이에겐 실제 전기 충격이 가해져서 고통을 받도록 한 실험. 피실험 원숭이는 자신이 먹이가 나오는 버튼을 눌렀을 때 학생 역할의 원숭이가 전기 충격으로 고통받는 것을 보고는 다시는 그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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