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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Oct 25. 2018

싫어하는 사람에게서 배운 것들

싫어하는 사람에게 있는 역량은, 대개 나에게 부족한 것들

사람의 '본능'은 '생존'을 향한다.

우리가 느끼는 모든 감정과 그에 따른 행동은 생존을 위한 것임을 알아채야 한다. 생물학적 생존뿐만 아니라, 사회 생존도 중요하다. 직장에서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도 다 살기 위한 '촉'이다. 무서운 상대에겐 복종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더러운 것은 피해야 한다는 것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안다.


그래서 우리는 싫어하는 사람을 본능적으로 피한다.

한 공간에 같이 있다고 피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본능적으로 같이 있기만 해도 불편한 사람은 있기 마련이고, 직장은 이런 것에 관계없이 그 둘을 한 공간에 모아 놓고 일을 하게 만드는 얄궂은 운명의 또 다른 이름이다. 싫어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의 모든 것이 싫다. 좋은 표현으로 '꼴도 보기 싫다'라는 말이 있다. 그 말 한마디면, 모든 것이 설명될 것이다.


그런데 직장생활을 좀 하다 보니,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도 예전처럼 요동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게다가, 싫어하는 사람에게서 그 사람의 '장점'과 '단점'을 구분해서 끄집어내는 여유도 생긴다. '저렇게 해야지'라는 것도 배움이지만, '저러진 말아야지'라는 것도 배움이다. 싫어하는 사람을 무작정 피하기만 하면 이런 배움은 없다.


때론, 싫어하는 상대방이 나를 괴롭히는 어떤 부분이 나에겐 부족한 것일 때가 있다. 놀랍게도 이런 깨달음은 삶에 꽤 큰 선물이 되어 돌아다. 이걸 알아차리고, 배움으로 승화하려면 고도의 내공이 필요하다. 그것은 시간의 선물이던가, 아니면 지금 이와 같은 글을 읽고 얻는 깨달음일 수 있다.


1.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에게서


정말이지, 세상 부정적인 사람을 만났다.

해외 주재를 하며 모신 상사였는데, 사사건건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모습을 보고는 본능적으로 피하고만 싶었던 사람이었다. 누군가 어떤 행동을 하면, 뭔가 의도가 있을 거라며 의심했다. 그 의심은 정말로 근거가 없는 비합리적 의심이었다. 누군가 하루 결근을 하면, 저 사람 다른 회사 알아보고 있군... 이라며 곧바로 결론을 짓는 식이다. 어떤 성과가 나서 사람들이 다 서로에게 수고했다고 이야기할 때, 한치의 웃음도 보이지 않으며 잘못된 부분을 들이밀어 분위기를 깨기도 하고, 식당에 가서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이건 조미료 범벅이라거나 재료가 신선하지 않은 냉동이라고 호도하기도 했다. (하도, 부정적으로 이야기해서 식당 주인에게 개인적으로 확인해본 결과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았고, 재료는 신선한 자연산이었다.)


하지만 놀라운 건, 그 '비합리적인 의심'은 50% 이상의 적중률을 보였다는 것이다.

결근한 사람 중 일부는 정말로 퇴사를 했고, 성과가 난 일을 돌아보니 부족한 부분은 분명 있었다. 이건 마치 아래와 같은 논리일 수 있다.


넌, 언젠간 감기가 걸릴 거야.
(감기는 누구나 언젠간 걸린다!!!)

(감기 걸린 것을 보고)
거봐, 감기 걸렸잖아. 그러니까 손 잘 씻고, 관리 잘했어야지 쯧쯧... 이런 느낌!


잘 알다시피 세상엔 '성선설' 뿐만 아니라 '성악설'도 있다. 세상은 결국 어수선해지고 만다는 엔트로피 법칙도 있다. 그 상사는 '성악설'과 '엔트로피 법칙'으로 무장한 사람처럼 보였다. 항상 긍정적이고, 사람들에게 동기를 심어주려 하는 나와는 정반대처럼 느껴졌고, 사사건건 불편했다.


어느 날 내가 믿던 현지 동료가 (평소 약속을 깨고) 한 마디 상의 없이 갑자기 퇴사를 하는 일이 있었다. 뭔가 잘 되어 간다고 생각했던 마케팅 프로모션 행사의 현장을 찾아가니, 허점 투성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적도 있다.

하나 둘, 내가 너무 긍정적으로만 세상을 보고 있나라는 깨달음이 생길 때 난 그 상사의 색안경을 잠시 빌려 세상을 바라봤다. 그러니 보이는 게 있었다. 갑자기 퇴사한 그 동료를 내가 너무 믿었고, 잘 되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일들에는 분명 문제가 하나 이상은 있던 것이다.


결국, 난 그 상사를 좋아하진 않았지만 때론 세상을 부정적으로도 봐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 그 상사도 직장을 다니기 전에는 그 정도는 아니었을 거라 믿고 싶다. 난, 지금도 가끔 그 상사의 시선으로 색안경을 꺼내어 주위를 둘러보곤 한다. 정말 큰 도움이 되는 걸 느끼면서!


2. 주는 것 없이 미운데, 실력과 붙임성을 겸비한 후배에게서


배움은 위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후배들에게서도 배울 것이 많다. 나를 많이 실망시킨 후배가 있었다. 일을 요청할 때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고, 내가 한 조언과 충고를 잘못 이해하고 행동하곤 했다. 미국과 한국 두 국적을 가진 친구였는데, 자신이 불리할 때를 모면하려 그 두 개를 교활하게 이용했다. 불리하면 한국사람에게 미국인으로 행세하고, 유리하면 한국인임을 강조했다. 빤히 보이는 그 모습이 정말 싫었다. 그러한 태도가 문제가 되었던 날, 난 그 후배를 크게 혼낸 적이 있다. 얼마큼의 깨달음을 얻었는지 모르겠으나, 어느 정도는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고 내가 그 후배를 덜 싫어하게 된 건 아니다.

하지만 그 이후 후배의 행동은 나를 당황시켰다. (아마도) 내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 텐데도, 점심이나 회식 자리엔 항상 내 옆에 앉았다. 평소에도 좀 더 잘하려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언제부턴가 난, 그 용기(?)와 붙임성을 높이 사기 시작했다. 피하려고만 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무언가를 만회하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솔직히 나라면 어땠을까? 십중팔구 피하고 봤을 것이다. 나를 싫어한다고 생각하는 상사의 옆자리엔 얼씬도 안 했을 것이고, 살갑게 그 사람을 대할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정말로 큰 배움이었다. 때론, 자격지심에 저분은 나를 좋아하지 않을 거야...라는 생각에 윗분들을 피한적이 많았는데 그 이후로는 가능한 상사와 가까운 자리에 앉으려 노력한다. 상대방이 나를 싫어하든 좋아하든 개의치 않고, 내가 먼저 다가가려 노력하다 보니 풀린 오해도 많고 관계가 더 자연스러워졌다.

난, 아직도 그 후배를 예뻐라 하지 않는다. 하지만, 큰 깨달음을 준 것에 대해선 고마움을 느낀다. 개의치 않고 다가오는 용기에 아직도 박수를 보낸다.


3. 너무 집요해서 사람들을 괴롭히는 상사에게서


주말에 전화가 오는 건 기본이었다.

올린 보고서는 언제나 지적을 당했다. 그 집요함은 수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했다. 승진을 하며 승승장구했지만, 그 상사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다. 무척 외로워 보였다. 후배들은 물론, 그 상사의 선배들도 불편하긴 매한가지였다. 선배들은 그 상사를 가리켜, 자기만 회사를 위하고 자기만 고민하는 줄 안다고 혀를 찼다. 그건 범상치 않은 재주였다. 보통은 후배들을 괴롭히는 게 자연스러운데, 선배들까지 마음이 불편할 정도면 정말 대단한 것이다.


한 번은 책상에 전화기를 두고 화장실을 간 적이 있다.

아마도 급하게 나에게서 뭔가가 필요했는 모양. 잠시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 부재중 전화가 10통 와있었다. 내 자리와 그 상사의 자리는 칸막이 2칸 거리였고, 거리는 세 걸음 정도였다. 내가 전화기를 두고 화장실을 간 것을 알았던 그 상사는, 당장 무언가를 알아야겠다는 집요함으로 내가 올 때까지 전화를 한 것이다. 영화 미저리가 생각났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 집요함 또한 나에게 배움과 선물이 되었다.

해외 주재원으로 발령받아, 먼 이국 땅에서 외롭게 그 시작을 고군분투하던 시절. 무엇부터 해야 하고, 수많은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할지 모를 때, 난 놀랍게도 그 상사를 생각했다.


그분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솔직히, 스스로 놀랐다.

왜 그분을 생각해냈을까? 소름 끼치도록 이해가 안 되고 불편했던 그 상사는 내가 어려움을 이겨낼 집요함을 가지고 있던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난 그것이 부족했던 것이고 그 상사를 통해서 내가 부족한 새로운 역량을 배운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그 '집요함'은 큰 선물이다. 디테일을 알게 되고, 성과지향적으로 일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난 그 어려운 시절을 그분에게 배운 그러니까 나에게는 부족했던 그 '집요함'으로 이겨냈다. 때때로 직장 생활에서 어려운 과제를 받거나 도전적인 문제를 마주하면 난 그분을 떠올리며 '집요함'으로 다시 한번 더 무장한다.




'배움'을 위해서는 상대를 가릴 필요가 없다.

상대방이 왜 싫은지에 대해 고민하고 피해 다니기보단, 그 사람에게서 뽑아먹을 역량을 알아차리는 게 훨씬 낫다. 다시 한번 더 말하지만, 배울 것과 배우지 말아야 할 것 둘 다 소중하다.


더불어, 싫어하는 사람에게 있는 역량이 대개는 내게 부족한 무엇인 경우가 많다.


누군가를 싫어하는 자신을 탓하거나, 나를 싫어하는 누군가를 불편해할 필요 없다.

우리는 그저, 자신을 위한 '배움'에 집중하면 된다.

그게 남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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