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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Sep 10. 2018

왜 마음먹은 대로 실천하지 못할까?

나를 항상 이기는 또 다른 나와 함께

마음을 먹다!


마음은 먹을 수 없다.

그건 누구라도 안다. 마음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다. 만질 수도, 요리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 의미는 누구라도 공감한다. 단순히 무엇을 하겠다는 결심보다, 더 큰 범주의 다짐이기 때문이다. 이 비유적인 표현은, 대개 어떠한 충격을 받았거나 지금 자신의 모습에 크게 만족하지 못할 때 사용되곤 한다.


나는 마음을 자주 먹는다. 마음먹은 대로였다면, 나는 오늘 어학 공부를 1시간 했어야 했다. 평생 다이어트가 필요한 체질이라 밖으로 나가 적어도 30분 이상은 뛰었어야 했다. 브런치에 글을 하루에 하나 이상 썼어야 했고, 출판을 목전에 둔 매거진의 개고도 꾸준히 했어야 했다. 구석에 쌓인 책을 하나라도 집어 들었어야 했고, 한 번 읽은 책의 복기도 펜을 들어 노트에 한 자, 한 자 의미를 담아 눌러써야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지만 매일 있는 일이라 자연스럽게도) 마음먹은 일을 하나도 하지 못했다. 오히려 스스로를 괴롭히며 먹는 걸로 그 압박감을 회피하고, 글을 쓰고자 하는 소재는 메모지에 차곡차곡 적었지만 그것은 글로 승화되지 못하고 그저 쌓여가고만 있다. 납기가 다가오는 일들에 불안해는 하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렇게, 마음을 먹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결국 가장 힘든 건 나 자신이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항상 지는 나를 발견하며, 역설적으로는 나 자신이 정말 얼마나 강한지를 깨닫는다. 자괴감이 생기고, 자신감마저 떨어져 사방에선 '슬럼프'의 기운이 들쑥날쑥하는 느낌이다.


도대체 왜?


날마다 스스로를 꾸짖으면서, 실천하지는 않는 나를 돌아보기로 했다.

이 지긋지긋한 악순환은 왜 일어날까? 왜 나는 마음먹은 대로 실천하지 못할까?


첫째, 시간이 많다고 착각한다.


출장을 다녀와 도착한 날이 금요일. 나에겐 금요일 저녁과 토요일 그리고 일요일이라는 시간이 있었다. 이 시간이면 마감 기한이 닥친 글의 개고를 하기에 충분하다 생각했다. 물리적으로 생각하면 48시간이 훨씬 넘는 시간이라 그도 그럴만했다.

하지만, 시간은 언제나 부족하다. 48 시 내내 글을 개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건 착각이다. 잠자는 시간, 밥 먹는 시간, 아이들과 놀아줘야 하는 시간, 집안일 해야 하는 시간 등. 언제나 시간은 부족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디서 그것이 충분하단 과도한 착각이 튀어나오는지 모르겠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수 십 년을 살아오면서 그렇게 착각하고 또 속고 만다.


둘째, 지금의 감정이 특정 시점에도 유효하다 착각한다.


마음을 먹는 그 시점은 대개 '감정적'인 경우가 많다.

셀카를 찍었는데 얼굴이 크게 나왔다거나, 옷을 입었는데 배가 나왔다거나. 아니면, 오랜만에 만난 사람이 무심코 던진 "살 좀 쪘네?"란 한 마디에 기분이 울적해진다. 그러면 큰 다짐을 한다. 당장 '소식'을 결심하고, 저녁에는 공복에 뜀박질을 하겠단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감정'은 유동적이다. 지금의 '감정'이, 오늘 저녁에 내가 운동복을 입고 나가 뛸 만큼 유효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 시점엔, 또 그때의 '감정'이 존재한다. 기분이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고 갑자기 허기질 수도 있고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감정'이 생길 수도 있다.


셋째, 완벽하게 하지 못할 거란 두려움에 시작조차 하지 못한다.


누가 보면 완벽주의자인 줄 알겠지만, 나는 스스로를 겁쟁이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고 시작한 일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 실천하지 못하고 일을 뒤로 미루는 경우는 이에 해당된다. 독일 보훔 루트 대학 생물심리학 교수 연구팀도 이러한 증상을 일컬어 '지연 행동'이란 이름을 붙였다. '지연 행동'을 보이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감정을 관장하는 '편도체'가 큰 것을 발견했다. '편도체'가 크다는 건, 그만큼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있다는 걸 크게 느낀다는 것이다. 결국, 하고 싶은 마음은 있으면서도 흐지부지 되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아예 그것을 덮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아마, 내 편도체의 크기는 그 누구보다 클 것....)


넷째, 자신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나는 꾸준한 사람이 아니다. 게다가 '감정적'으로 많이 요동한다.

나는 스스로를 잘 안다. 그런데, 계획을 짤 때만큼은 그걸 잘 잊는 모양이다. 잘 알면서도, 계획은 거대하게 세운다.

출장에서 돌아왔을 때, 내 몸 상태는 영 아니었다. 시차는 서쪽보다는 동쪽으로 갈 때 더 힘들다. 서쪽에서 날아온 나는, 시차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주말 계획을 세웠다. 그리곤, 힘들어하는 자신에게 의지가 없다며 몰아세웠다. 나의 성향은 물론, 상황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급한 건 알겠는데, 왜 이리 스스로를 괴롭히는지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작은 성취에 만족하지 못한다.


아마, 지금 수준으론 한 달에 한 번 조깅을 해도 난 스스로를 칭찬해야 할 것이다.

나의 상황과 의지, 그리고 성향과 역량을 봤을 때 그러하다. 그러고 나서, 한 달에 두 번 조깅을 하면 더 기뻐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그렇게 시작이라도 하고, 작은 성취라도 만족하고 스스로를 북돋우면 되는데,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다. 작은 성취는, 성취라고 인정도 하지 않는다. 해도 그리 기쁘지 않고, 작다는 것에 매몰되어 스스로를 또 몰아세운다.




이렇게 스스로를 돌아보니, 난 천하의 욕심쟁이다.

모자란 역량, 유동적인 감정, 처해진 상황은 고려도 하지 않고 한 번에 모든 것을 바꾸려는 탐욕이 가득하다. 그것이 열망이 아닌 탐욕이다 보니, 비난의 화살은 뾰족하게 갈리고 그것은 결국 나를 향한다.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아마도, 이 글이 그 돌파구의 시작이 될 것이다. 위에 적은 것들을 역으로 생각해보고 실천하고자 한다. 그리고 잊을만하면, 꺼내보려 한다. 이 글을 쓰는 목적이기도 한다.


시간은 한정적이고 소중하다는 것, '감정'의 요동을 인정하고 그것에 휘둘리지 않는 계획을 세우는 것,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는 마음가짐,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살피고 행동하는 것 그리고 작은 것 하나라도 성취했을 때 그것에서 '의미'를 찾는 것.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것은 나 자신이 잘 되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그러니, 나를 믿고 조급해하지 않아야겠다.


마음먹기 전에, 나 스스로와 충분히 협의를 해야겠단 생각도 든다.

언제나 나를 이겨왔던 또 다른 나 자신의 힘을 빌려보는 것도 방법일 테니!




'직장내공' (나를 지키고 성장시키며 일하기!)

'오늘도 출근을 해냅니다' (생각보다 대단한 자신을 만나고 싶다면!)

'진짜 네덜란드 이야기' (알려지지 않은 네덜란드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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