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테르담 Nov 18. 2018

짐노페디 1번

짐노페디 1번을 들으면, 그럴 용기가 생긴다.

네덜란드에서 주재원을 할 때였다.

집에서 사무실까지의 거리는 차로 10여 분 거리. 동네를 나와 도로가에 접어들면 초원이 펼쳐졌다. 초원을 향해 달리다 일부러 좁은 골목 어귀로 핸들을 돌리면, 양쪽으로 나무가 가지런한 그림 같은 길을 만날 수 있었다. 직장인이라는 타이틀에 주재원이라는 옷까지 입혀지면, 그야말로 삶은 버겁다. 비싼 돈 들여 나를 내보낸 회사는 잠시 잠깐도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그 와중에 그런 아름다운 길이 있었다는 건, 신이 아직은 나를 버리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처음엔 스트레스를 날려 버리기 위해 신나는 '과일 100곡' 노래를 들으며 달렸다.

그런데 그 신나는 노래와, 물안개가 자욱이 올라오는 초원 그리고 그 안에서 그림과 같이 풀을 뜯고 있는 양과 소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한국에서 비트 있는 음악과 함께 새벽 강변북로를 달리면 조금은 괜찮았던 것 같은데. 갑자기 집 어딘가에 굴러 다니던 클래식 CD 한 장이 생각났다. 나는 클래식 CD를 차 오디오에 꼽았다.


감미로운 선율은 차창 밖을 지나는 모든 풍경과 어우러졌다.

그리고 마음은 차분해졌다. 10분 뒤면 할 수 없이 전쟁터에 도착하는 가련한 존재였지만, 아름다운 선율과 그림 같은 풍경은 끝내 나를 위로했다. 순간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근길에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게, 내평생 과연 몇번이나 될까. 가끔은 잠시 차를 세우고, 이른 아침 초원의 공기를 폐 안으로 힘껏 머금었다. 그러면 무언가 좀 진정이 되었다. 왠지, 날아오는 총알도 피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근거 없는 용기와 함께.


그중에서 내 마음을 가장 부드럽게 어루만졌던 곡은 '짐노페디 1번'이었다.

클래식에 별 관심도 없었기에, 난 그 곡의 제목을 나중에야 알았다. 눈을 감고 이곡을 들으면, 지금도 자욱한 물안개와 넓은 초원 그리고 운하가 생각난다. 백조가 움직이면 그것의 움직임에 따라 물결은 작게 요동한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마음의 출렁임이 그만큼만 되었으면 하는 바람. 비록 그것이, 현실에선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란 걸 알면서도 나는 그것을 갈구했다.


프랑스 옹플레흐에 갔을 때, 난 그래서 에릭 사티의 생가를 방문했다.

박물관으로 사용되는 그곳의 앞마당엔 짐노페디가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굴러다니던 그 CD는 주재기간인 4년 내내 차 안에서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한 다짐이자, 그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작은 물결을 생각해내기 위한 스스로의 조치였다.


짐노페디 1번은 내 휴대폰에도 여전히 저장되어 있다.

통근 버스를 탈 때나, 지하철을 탈 때. 직장에서 생각보다 큰 물결을 만났을 때. 난 나에게 이 음악을 들려준다. 그리곤 눈을 감아 스스로를 토닥인다. 그럴 수도 있고, 나에게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며, 직장이란 원래 이런 곳이라고. 아름답게 끊기는 선율이, 심호흡을 할 수 있는 여유와 용기를  준다.


힘든 직장생활로 인해 짐노페디를 만났으니 고마워해야 할까.

힘겹지만, 나를 사랑하기 위해선 직장인인 나를 받아들여야 한다.


짐노페디 1번을 들으면, 그럴 용기가 생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