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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승범 Oct 23. 2015

함께하는  두리띠어

그러나 신용은 은행이 평가하는 게 아니다.

신용은 은행이 평가하는 게 아니다. 바로, 당신이 속한 그 사회, 당신을 보고 있는 그 사회에서 평가한다” [파산 | 이건범著 | 피어나刊 2014년]


2015년 6월 10일 오후 4시 서울중앙지방법원 제4별관 제6호 법정. 1년여 긴 여정이 드디어 끝났다. 


2003년 임원으로 근무하던 4년차 벤처기업인 회사는 신규사업을 위해 기술보증보험과  하나은행으로부터 11억여 원을 빌렸다. 그 과정에서 나는 연대보증서에 도장을 찍었다. 왜 그런 힘든 일을 했냐고 하지만 회사를 살린다는 입장에서 지금이라도 같은 결정을 할 것 같다.


그러나 회사 경영이 어려워지자 주채무자인 대표이사 등은 미국으로 떠나갔다. 이후 회사에 남아 사업과 직원들을 정리하는 작업을 했다. 그리고 일부 직원들과 함께 상장기업에 입사를 했다. 그리고 그 모든 채무는 계속해서 직장생활을 해야 하는 나에게 온전히 부담으로 넘겨졌다.


이후 10여 년간 상장기업 임원으로 근무하며 그 연대보증에 대한 책임을 지고 채무를 갚아나갔다. 따로 숨겨놓은 재산이 없는 유리알 직장 급여를 받는 입장에서 다른 대안이 없었다. 급여 압류 등이 회사에 들어올 경우 퇴사해야 했기에 그것을 막아야 했다. 그렇게 10여 년을 이겨냈다. 


작년 회사를 퇴직하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며 새로운 시작도 없다고 판단했다. 결국 원금과 이자 그리고 그 때문에 생긴 또 다른 채무까지 모두 21억여 원에 대해 파산 신청을 했고 2014년 9월 29일 파산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2015년 6월 10일 그에 대한 면책을 판결받았다


'실패의 기록은 쓰기 어렵다' 1996년 창업에 대해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직장 후배와 강남구 포이동에 작은 사무실을 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찌 그런 결정을 했는지 황당하다. 몇몇 지인의 도움으로 노트북 주변기기 유통 등으로 수익이 생겼다. 하지만 수익이 생기자 접대라는 명목으로 값비싼 술집을 드나들게 되었다. 


결국 내실이 튼실하지 않은 회사 상황에서 IMF 파고를 넘을 수 없었다. 수억 원의 빚을 지고 회사 문을 닫았다. 그리고 자주 드나들던 값비싼 술집 등에서 대리운전을 하기도 했다.


5년 후 신용불량이 풀리고 정상적인 경제활동이 가능해지며 가장 먼저 한 일이 회사가 빌리는 자금에 대한 "연대보증"이 되었다. 두 번의 어려움은 나의 삶을 왜곡시켰고 위축시켰다. 가장 큰 피해는 '가족'이었다. 상장회사 임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으로 항상 쪼들렸다. 


넉넉하지 못한 가정경제로 인해 그 흔한 국내외 여행도 엄두를 못 내고, 아이들에게 그 흔한 사교육도 넉넉하게 도움을 주지 못하는 등 다른 가정과 같은 조건의 생활을 할 수 없었다.   


이제 새로운 시작을 꿈꾼다. 회사를 떠난 지천명 장년에게 사회는 녹녹지 않다. 나의 역량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한다. 


'함께 일하고 성장하는 두리띠어' 그러나 꿈을 이루는 과정은 혼자 할 수 없다. 함께하는 고객, 동료, 가족이 있어야 비로소 꿈을 이룰 수 있다. 그래서 함께 성장하는 비전을 갖고 나누고 협력하는 가치를 추구하며 생활하고자 한다. 


그래서 사회에서 올바르게 평가받고 싶다. 우선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한다. 이렇게 '두리띠어'를 준비하고 있다 () 2015-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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