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일을 보러 오전에 집을 나섰다. 오랜만에 운동화를 신은 터라 발이 편했는데 집 앞 인도에서 신발끈이 풀린 것을 발견했다. 끈을 묶고 고개를 드니 주차금지를 위해 세워놓은 바리케이드가 눈에 띄었는데, 그 위에 뜬금없게 안경이 놓여있는 것이다. 요즘의 디자인은 아니었고 약간 예스러운 느낌을 내는 뿔테안경이었다. 렌즈는 네모모양에 전면부의 테는 얇은데 양쪽 다리의 테는 무척 두꺼운 모양이었다. 스쳐 지나갔었던 지라 색깔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붉은색이 조금 섞여있었던 듯하다. 일반적으로 50대 이상의 아주머니가 쓰실법한 디자인이라는 인상을 받고 바삐 발길을 옮겼다. 글로 옮기니 자리 잡고 안경을 들여다본 것 같지만, 신발끈을 묶고 고개를 든 후 5초 정도 되는 시간이었다. 주인 잃은 안경을 한참 들여다보는 무서운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점심을 먹으며 생각해 보니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안경을 잃어버릴 수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시력이 안 좋은 사람이 안경을 벗을 일은 씻거나 잘 때 정도이니 안경을 이런 식으로 두고 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당장 앞이 안 보이니 두고 갈 수가 없다. 그렇다면 합리적으로 추론해 보건대 아마 그 안경은 돋보기안경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주차장 바리케이드 위에? 거기에 안경을 놓을 상황들을 머릿속으로 상상해 봤지만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이 쓸데없는 고민(?)의 맥락에서 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조여정과 이제는 고인이 된 이선균의 앙상블이 돋보인 씬. 영화 <기생충>
아마 다들 이 영화를 봤을 거라 생각하고 이 장면을 대충 되짚자면, 영화에서 이선균은 자신의 차 안에서 여자의 팬티를 발견하고 집으로 가지고 온다. 이선균은 아내인 조여정과 함께 자신들의 운전기사인 젊은 남자(차량 뒷자리에서 팬티를 잃어버린 여자와 정사를 치렀을 것으로 의심받는)를 비난한다. 그리고 팬티의 출처를 놓고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이선균이 자신의 추측을 뱉는데. 이게 재미있다.
일반적으로 일을 치르다가 귀걸이 같은 것들을 잃어버릴 수는 있어도 어떻게 팬티를 잃어버리냐는 것이다. 따라서 이 팬티를 잃어버린 여자의 정신상태는 의심스러우며 약물을 복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꽤 합리적인 추측이지만, 이 팬티는 운전기사의 일자리를 노린 반지하 가족의 술책이었다. 애초에 이 영화 안에서 조여정-이선균 부부가 겪는 일들은 현실(그들의)에서 나타나기 어려운 사건의 연속이고 이 팬티사건 또한 마찬가지다. 부부가 사는 상류층 세계에서의 문제라고 하면 돈(생계와 관련된 돈) 문제보다는 쾌락이나 퇴폐(미학적 의미에서)와 관련된 문제들이 많이 발생할 것은 뻔한 일이고 따라서 팬티의 출처에 이 요소들을 끌어와 의심하는 것도 당연해 보인다.
~여기에 한 가지만 더 덧붙이고 싶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던 관객들은 위 사진의 장면에서 왜 웃었을까? 아마도 대부분은 조여정의 나이브함과 이선균의 예상치 못한 엉뚱한 추측(관객들은 팬티사건의 실체를 알고 있기도 하다)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입장에 관객이 들어가 보면, 정말 아내가 나이브했는지 남편이 엉뚱하게 추측했는지 의심이 든다. 조여정은 상류층의 사모님으로 살면서 사람들을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주변의 사람들은 대부분 사회적, 경제적으로 인정받는 소위 인증된 사람들이었으니까. 반지하 가족의 침투는 그녀의 상상력 바깥의 사건이었다. 이선균의 의심도 그의 입장에서는 엉뚱한 것이 아니다. 사람은 자신이 욕망했던 것들을 이루고 나면 퇴폐에 빠져들기 쉽고 사회, 경제적으로 성공한 그의 주변에는 그런 인물들이 많았을 것으로 예상되니까. 부부의 입장에서 둘은 합리적으로 추측하고 반응했다. 즉, 이 장면이 창출한 웃음의 크기만큼 조여정-이선균 부부와 관객 사이는 벌어져있는 것이다. 다시 돌이켜봐도 잘 만든 씬이다.~
자, 여기서 갑자기 뜬금없는 퀴즈 하나를 내보겠다. (기생충이라는 영화적 맥락에서) 한국 반지하 이하의 계급이 자신의 차량 뒷자리에서 아내가 아닌 여자의 팬티를 발견한다면. 운전기사에게 보통 어떤 의심을 할까?
정답은 '반지하 계급에게는 운전기사 자체가 없다'이다. 썰렁한 퀴즈여서 미안하지만,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각자가 상상하고 의심하는 것은 제한적이다. 꼭 자본주의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시스템 안에 겹쳐있는 수많은 체제와 관습들. 권위, 예의, 가족, 결혼, 지위 등등. 그 안에서 우리의 상상력은 얼마나 빈약한지.
뭐 멀리멀리 돌아왔지만, 어쨌든 이 팬티사건과 마찬가지로 안경을 잃어버리는 일도 일상에서 일어나기 쉽지 않은 현상임은 확실하다. 하지만 어쨌든 불가능해 보이는 현상은 현실에서 벌어져있고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 현상을 해석할(바라볼) 것인가? 여기에서 위의 썰렁한 퀴즈가 주는 아이디어가 도움을 줄 수도 있겠다.
나는 돋보기안경을 쓰는 이들의 일반적인 생활패턴을 모른다. 번거롭게 안경집을 들고 다니지는 않을 것 같고. 손에 들고 다니다가 주머니에 꽂아놓고 다니려나. 그리고 차를 운전할 때는 맨눈으로 진행하고, 주차할 때만 왼쪽 사이드미러를 잘 보기 위해 돋보기안경을 끼는 걸지도 모른다. 차에서 내릴 때는 평소처럼 안경을 벗어 손에 들고 있다가 바리케이드 위에 무심코 놓아버렸을 지도. 이렇게 한 번 그들에게 들어갔다 나와본다.
이런 쓸데없는 생각들을 하며 그날의 점심을 먹었다. 저녁때 돌아오며 안경이 있던 바리케이드 위를 보니 안경이 없었다. 아마 주인이 찾아갔겠지.
+이날의 점심은 서브웨이 샌드위치였다. 오랜만에 먹으니 무척 맛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