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가는 날

짧은 이야기 2

by stf

염 씨는 이제 막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선 참이었다.


"축하해요!"


불 꺼진 주방에 자리 잡고 있던 화숙이 케이크를 들고 염 씨를 놀라게 했다. 잠시 어안이 벙벙해하던 염 씨는 곧 상황을 알아채고 케이크의 초에 붙은 불을 후 불어 껐다. 몇몇 초들이 제대로 꺼지지 않아 몇 번이고 다시 불어야 했다.

초들이 많았다. 긴 초 여섯 개와 작은 초 두 개. 그중 긴 것 네 개는 염 씨와 화숙이 함께 보낸 기간이었다. 둘은 기다란 초 네 개의 시간 동안, 그들의 모든 빚을 갚았고 사치를 하지 않는다면 꽤 풍족하게 노년을 보낼만한 적당한 연금을 마련했다. 물론 부부의 빚을 청산하는 과정에는 신혼부터 살고있던 지금의 아파트가 재건축 지역에 선정되는 행운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들의 지난한 시간에 비춰보면 그것은 정말이지 작고 때늦은 행운에 불과했다.

그리고 오늘은 염 씨의 생일이자 공식적인 은퇴날이었다. 게다가 내일은 부부가 교외에 마련한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가는 날이었으니 따지고 보면 축하할 것은 차고 넘쳤다. 화숙이 케이크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포장된 이삿짐들을 피해 주방의 불을 켜는 스위치를 향해 움직였다. 염 씨는 깜깜한 주방 의자에 앉아있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전에 없던 충만함을 느꼈다.




"정말 맛있네."

"다행이다. 당신한테 달까 봐 걱정했는데."


사실 염 씨의 입맛에 생크림 케이크는 너무 달았지만, 이 날은 정말이지 무엇을 먹어도 맛있게 느껴질 것만 같았다. 둘은 꽤 오랫동안 별말 없이 케이크를 먹었다. 염 씨는 부부가 서로의 생일을 함께 보낸 적이 언제였는지 떠올리려 해 봤으나 그건 정말 까마득한 일이어서 금세 포기했다.

화숙은 중학교 교사로 40여 년을 일하다가 얼마 전 정년퇴직했고 염 씨는 젊은 날 식당을 운영하다가 빚을 지고 40대부터는 이런저런 건설일을 전전해온 터였다. 지방을 돌아다니는 건설일 특성상 부부는 서로의 생일을 축하 문자로 갈음해 왔다. 특별할 것 없는 그런 뻔한 이야기였다.

테이블 맞은편, 화숙의 포크질이 멎은 것을 알아차린 염 씨가 시선을 그녀에게 돌렸다. 화숙은 포크를 내려놓고 생각에 빠진 듯 베란다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밖은 그다지 좋은 풍경이 못됐다. 당신이 구축 아파트 단지에 속해있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말라는 듯, 맞은편의 삭막한 아파트 동이 그들을 빤히 마주 보고 있었다.

화숙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 차이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눈치채지 못할 만큼 미세했지만, 화숙과 긴 시간을 함께한 염 씨는 그녀가 눈물을 간신히 참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염 씨는 화숙이 감정을 삼킬 수 있도록 모른 척 케이크를 몇 번 더 먹었다. 숨기고 싶어 하는 감정을 괜히 끄집어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 한편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부채감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공기가 빵빵히 들어찬 커다란 튜브가 물 밑에서부터 올라올 때의 부력이 온몸으로 전달되는 것만 같았다.



"정말 고생했어요."

화숙이 어느 정도 진정된 것 같자, 염 씨가 포크를 내려놓고 들릴 듯 말 듯 읊조렸다. 화숙이 시선을 돌려 염 씨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염 씨는 테이블 위에 놓인 화숙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차가운 손이 목덜미에 닿기라도 한듯 몸을 한 번 떨었지만, 곧 염 씨에게 온전히 자신의 손을 맡겼다. 염 씨는 나무껍질처럼 뻣뻣해진 화숙의 손을 형사가 조사라도 하듯 낱낱이 살펴보았다.

낮에는 어린 학생들과 부대끼고, 퇴근 후에는 한 시간 거리의 아는 언니가 운영하는 식당에 나가 몰래 일하는 것이 화숙의 평소 일과였다. 공무원의 허가 없는 겸직은 불법이었기 때문에 혹시라도 학생이나 학부형과 마주칠까 마스크에 안경까지, 변장에 가까운 소품들을 착용하고 일을 했던 화숙이었다. 손바닥의 나이테는 예상보다 너무 많고 깊었다.

이 모든 게 염 씨의 빚 때문이었다. 아니, 어쩌면 애초에 넉넉지 않은 집안에서 태어난 염 씨가 유복한 가정에서 안정적 삶의 궤도를 유지하고 있던 화숙에게 함께하자고 제안한 것부터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어쩌면 그 이전부터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손을 내려놓은 염 씨가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자 화숙이 깜짝 놀라 티슈를 내밀었다. 염 씨의 울음은 티슈 몇 장이 흡수할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화숙은 눈물을 그치게 할 생각을 접고, 그렁그렁한 눈으로 염 씨를 지켜보았다. 아마 오늘 저녁은 철 지난 늙은이들의 울음바다가 될 모양이었다.



"당신도 고생했어요."

화숙이 한 마디 얹자, 염 씨가 갓 태어난 아기가 숨을 쉬기 위해 필사적으로 우는 것처럼 엉엉 울어 젖혔다.


"내가 울어야 할 것까지 다 울겠네."

화숙이 장난스레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삿짐이 가득한 낡은 아파트에 염 씨의 울음소리가 가득 찼다.







"자?"

"아니, 아직."


염 씨는 등을 돌리고 잠을 청하는 화숙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다 울어버려서 미안하다고. 울어야 할 건 당신인데."

"그게 마음에 걸렸어?"


화숙이 피식 웃으며 몸을 바로 뉘었다. 침실의 창문을 통해 들어온 달빛이 화숙의 얼굴에 묻었다. 젊었을 적 매끈했던 피부는 부쩍 거칠어 보였다. 염 씨는 반사적으로 달의 표면을 떠올렸다가 곧바로 후회했다. 면목이 없었다. 화숙의 젊은 날은 염 씨가 앞으로 갚아나가야 할, 아마 영영 갚지 못할 빚이었다.



"고생시켜서 미안해. 미안하다고 용서될 것도 아니지만."

"용서는 무슨. 힘들었지만, 그래도 우리가 같이 있어서 재밌었던 시간들도 있었잖아."

화숙이 천장을 빤히 쳐다보았다. 염 씨는 그런 화숙의 옆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 말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당신만큼 날 좋아해 주는 남자도 없었고."

화숙은 자신이 말을 뱉어놓고는 스스로 웃음을 터뜨렸다. 염 씨도 여자를 따라 웃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내일부터는 우리도 조금 여유롭게 살아보자고요. 이놈의 지긋지긋한 도시 좀 벗어나서."

"그래, 어서어서 편히 자. 내가 괜히 잠을 깨웠지. 아침에 이삿짐 사람들 온다고 했으니까. 얼른."

염 씨의 재촉에 화숙은 다시 등을 돌려 잠을 청했고, 염 씨는 그녀의 등을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그나마 염 씨가 집에 들어오는 날이면, 항상 일을 마치고 늦게 집에 도착했던 터라 화숙이 잠들지 않은 모습을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눈을 감은 염 씨는 며칠 전, 아파트 단지 지하주차장에 가져다 놓은 새 차를 떠올렸다. 털털거리는 낡은 중고차를 10여 년 동안 몰아온 화숙에게 주는 작은 선물이었다. 그동안 보너스를 몰래 모아 구매한 회색의 매끄러운 철제 덩어리를 보면 화숙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염 씨의 심장이 설렘으로 두근거렸다. 염 씨는 잠시동안 자신이 부정맥이 아닌지 진지하게 의심했지만 곧 잠에 빠져들었다.



아침, 먼저 잠에서 깬 염 씨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십 년간 이른 시간에 일을 하다 보니 알람이 없어도, 오래 자고 싶어도 아침때가 되면 저절로 눈이 떠졌다. 화숙은 어제와 같은 자세로 꼼짝도 않고 아직까지 잠에 빠져있었다. 염 씨는 이사 때문에 피곤한 날이 될 테니 화숙을 최대한 늦게 깨워야겠다고 마음 먹고는 조심스레 주방으로 나가 이삿짐 박스를 뒤져 커피포트를 꺼냈다. 그리고 찬장 한구석에 숨겨놓은 머그컵과 커피믹스 한봉을 꺼내 들고 커피포트에 물을 부어 끓어오르기를 기다렸다. 약간의 당뇨수치가 있는 염 씨가 집에서 믹스커피를 마시는 건 공공연한 금기였기 때문에 관련된 물품들을 몰래 숨겨놓았다가 먹어야 하는 신세였다. 오늘따라 오래된 커피포트의 소음이 원망스러웠다. 끓는 시간도 오래 걸리는 주제에 소리까지 요란했다. 카페인이 간절했지만 화숙의 잠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염 씨가 화숙에게 새차의 키를 건네줄지 주차장으로 직접 데려가 본체를 보여줄지 고민하는 동안, 베란다 창밖으로 햇빛이 조금씩 비쳐오기 시작했다. 요즘 들어 부쩍 해 뜨는 시간이 당겨졌다. 여름이 다가온다는 신호였다. 염 씨는 이번 여름만큼은 철근과 목재더미 사이에서 땀을 흘릴 일은 없을 거라 안심했다. 때마침 커피포트가 부그르르 끓어오르더니 삐 하는 알림음을 내뱉었다. 염 씨는 머그컵에 커피믹스 가루들을 털어 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평소라면 건설현장에서의 시끄러운 소음과 함께 맡았을 달큼한 냄새가 조용한 집안에 퍼졌다.


베란다의 바닥타일을 향해 스멀스멀 밀려오는 햇빛을 보며 커피를 홀짝이던 염 씨는 문득 침실의 커튼을 쳐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바로 침실에 들어간 염 씨는 화숙이 깨지 않게 살금살금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쳤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에 내려앉았던 햇빛이 커튼에 가려졌다. 늘 아래 화숙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 있었다. 염 씨는 머그컵을 쥐고 있던 손으로 햇빛이 있었던 화숙의 얼굴자리를 만져보았다. 머그컵이 뜨거웠던 탓인지 화숙의 얼굴이 무척 차갑게 느껴졌다. 화숙을 내려다보던 염 씨가 머그컵을 창가에 내려놓고 이번에는 다른 손을 그녀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어찌 된 일인지 이번에도 화숙의 얼굴이 차가웠다. 그는 냉장고에 들어있을, 어제 먹다남은 케이크를 떠올렸다. 염 씨는 침대 옆에 오랫동안 혼자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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