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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찹쌀경단 Nov 08. 2022

부잣집으로 시집간다고
끝이 아니겠지

P은행 지현서 계장의 이야기 12

“엄마, 나 신혼집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받아.”

“왜 그래, 우리 딸. 무슨 일이야.”


“집 리모델링하는 거, 지난주에 어머니가 인테리어 업체 알아보셨다고 해서 같이 상담받으러 갔었거든. 상담까지는 괜찮았는데 너무 깊이 관여를 하시네. 방 네 개 중 하나는 꼭 손님방으로 만들어 두래. 시부모님이나 영국에서 석사하고 있는 시동생 방학 때 한국 들어오면 자고 갈 방 필요하다고.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얼마나 자주 오셔서 자고 갈 생각을 하시는 건지. 게다가 이 방은 어떤 가구, 저 방은 어떤 가구... 가구 배치까지 틀을 짜 주시는데 내가 원하는 대로 집을 꾸밀 수가 없어. 내 의견을 낼 수가 없어.”

“사돈댁이 관심이 아주 많으시구나. 집 꾸미는 건 준호랑 너랑 상의해서 예쁘게 꾸며야지. 신혼집인데.”


“내 말이. 신혼집에 대한 로망도 있었는데. 집 해주시는 건 너무 감사한데 이렇게까지 간섭을 받게 될 줄 몰랐어. 엄마, 그냥 집 안 받고 전세에서 시작한다고 하는 건 어떨까? 아니면 오빠랑 모은 돈에다가 일부 대출받아서 좀 작은 아파트 매수하는 방법도 있고.”


“쓸데없는 소리 마. 어른들끼리 이미 얘기 다 끝난 것에 대해서 뭘 어떻게 바꾸자는 거야. 얘가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 하고 있네. 집 있고 시작하는 거랑 없고 시작하는 건 천지차이야. 그것도 서울 시내에 40평대 아파트를. 결혼하면 1~2년 살고 끝나는 게 아니잖아. 그리고 너 은행 그렇게 다니기 힘들어하더니, 결혼 후 은행 그만두고 그 집에서 살림만 하면서 살려면 사돈댁 뜻에 어느 정도 맞춰드리는 것도 지혜야. 그 아파트는 사돈댁이 예전에 사셨던 집이라면서. 너희가 새롭게 꾸며서 살게 되니 얼마나 궁금하시겠니.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준호랑 이야기 잘하면서 집 꾸며봐.”


은행 그만두고 돈도 안(못) 벌면서 시부모님이 마련해주신 아파트에서 준호가 벌어온 돈으로 살림을 하려면 시어머니의 뜻대로 인테리어를 하고 시부모님 방도 마련을 해 놓아야 하는 건가? 안 그러면 너무 염치없는 건가?


그렇지만 살림을 한다는 게 놀고먹는 게 아닌데. 나는 그 누구보다 정성 들여 집을 가꾸고 아이들을 잘 키울 건데. 엄마의 말이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당장 내가 받는 스트레스는 어떡하지. 안 그래도 어려운 관계인 시어머니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데. 내가 철이 없는 것일까. 


예물 백 사건에 대해서는 엄마에게 말하지 않았다. 엄마가 과연 내 입장에서 함께 열을 내며 안타까워할지, 아니면 겨우 그거에 뭐 그리 의미를 부여하냐며 가방 잘 들고 다니라고 현서의 속상한 마음에 공감은커녕 찬물이나 끼얹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후자일 것 같아 현서는 예물 백은 그냥 마음에 묻기로 했다.



엄마와의 전화를 끊고 외출 준비를 했다.

강남의 한 스페인 음식점에서 친한 입행 동기들과 저녁 약속이 있었다.

감바스와 먹물 빠에야와 하몽을 올린 멜론에 와인 한 잔씩. 스페인 식당에서 여자 넷이 수다를 떨며 먹기에 딱 좋은 메뉴였다.


오늘 수다의 메인 주제는 단연코 현서의 결혼이었다. 현서는 남자 친구와의 만남부터 결혼 준비를 하는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동기들에게 말해주었다.


“와~ 부럽다. 요즘 집 해오는 남자 별로 없어. 40평대 아파트가 웬 말이야. 현서 부잣집으로 시집가네.”

“원래 좀 있는 집 시어머니들이 힘들게 한대. 아들 결혼할 때 팍팍 지원해주면서 자비로운 시어머니는 별로 없나 보더라고. 지원 해준만큼 아들 내외에게 간섭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지원 하나도 안 해주면서 온갖 간섭에 시집살이시키는 시어머니들도 많은데 뭐. 지원이라도 해 주니 다행 아니야?" 


미혼인 동기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했다.

다들 안 겪어봐서 모르는 거다. 남일이니까 저렇게 편하게 말하는 거지. 아니면 이런 게 당연한 건가?

아무도 마음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것 같아서 우울했다.


“나 얼마 전에 있었던 일반직 전환 시험 합격했어.”


현서의 결혼이 대화 소재로써 빛을 잃어갈 때쯤, 와인 한 모금을 마시며 선혜가 말했다.


이제 입행 4년 차에 접어든 현서와 동기들이다.


적어도 5년 이상의 근무경력이 있어야 일반직 전환에 도전을 해볼 수 있으니 일단 나중으로 미루고 있었는데. 아니, 사실 도전 안 할지도 모르고. 지금 제일 중요한 건 결혼이니까.


선혜는 현서와는 다른 의미로 눈에 띄는 스타일이었다. 외모는 평범한 편이지만 뭐든 열심히 하는 타입으로, 지방 국립대 영문과를 나왔다고 했다. 대학 졸업반 때부터 은행 취업을 준비했지만 번번이 일반직 대졸 공채에서 고배를 마셨고, 실망감에 대학원이나 진학해서 공부를 더 할까 싶었는데, 어서 취업전선에 뛰어들으라는 부모님의 등쌀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하는 수 없이 눈을 낮춰 텔러직으로 지원했다는 건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일 하다 보니 욕심이 생기더라고. 더 다양한 업무를 해보고 싶기도 하고, 승진하는 또래의 일반직 직원들 보니 부럽더라. 그리고 일반직이랑 비슷한 양의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은데 급여는 적고 승진도 못 하는 게 좀 억울해서 꼭 전환이 되고 싶어. 대졸 공채보다 쉽게 들어온 텔러라고 해서 우리가 일을 덜 하는 건 아니잖아.”


똑 부러지는 선혜다.

비교적 단순한 업무를 맡아하고 있다고는 해도 업무상 가장 스트레스가 큰 부분은 바로 실적인데, 텔러라고 해서 실적 스트레스를 덜 받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일반직으로 직군 전환될 때 고과가 중요하다는 것을 무기로 은근히 실적 압박을 더 받기도 한다. 게다가 대출이나 외국환 같은 복잡한 일 이외의 자질구레한 일들은 텔러에게 몰아주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가끔은 일반직보다 일을 더 하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사실 이런 얘기는 텔러 동기들끼리만 할 수 있는 얘기다. 잊을만하면 블라인드 게시판에 한 번씩 올라오는 직군 간의 갈등 때문에 겉으로는 절대 말 못 꺼내는 주제. 일반직 직원들은 스펙 덜 쌓아도, 2년제를 나와도 텔러로 들어온 후 일반직으로 전환하면 되는 거라면, 이건 처음부터 치열한 경쟁을 통해 들어온 일반직 직원들의 노력을 무시하는 역차별이라는 말을 한다.


텔러직은 텔러직대로, 일반직은 일반직대로 은행의 직군 체계에 불만이 있다.


“난 애초에 일반직이 목표였으니 꼭 전환이 되고 싶어. 이제 시험은 통과했으니 기본은 갖춘 거야. 앞으론 실적도 더 많이 하고 고과 잘 받는 데에 집중하려고.”

“언니, 시험공부 얼마나 했어? 많이 어려워? 어때?”


선혜의 말을 듣고 있던 진주였다. 진주는 전문대 회계학과를 나와 졸업하자마자 텔러로 취업한 케이스였다.


“난 거진 4개월 정도 한 것 같아. 꼭 한 번에 붙고 싶어서 주말마다 도서관 다녔어. 규정 위주로 공부하고, 선배들한테 기출문제 받아서 공부했어. 혹시 필요하면 줄게.”

“오, 고마워. 나도 이제 전환시험 준비해볼까 싶었는데.”


뭐야. 다들 전환시험에 관심이 많구나. 나만 지금 결혼한다고 결혼 준비에만 몰두하고 있었어.

마치 결혼하고 나면 끝인 것처럼.


“다들 남자 친구는 잘 만나고 있어? 선혜 너는 결혼은 언제쯤 할 생각이야?”


현서가 화제를 돌렸다. 왠지 나만 뒤처지는 것 같아서 전환시험 이야기가 불편하다.


“글쎄. 난 결혼은 아직 생각 없어. 돈도 많이 없고. 남자 친구도 피차 마찬가지지 뭐. 돈 더 모으고 생각해봐야지 싶어. 그리고 혹시 결혼 전에 전환되면 더 좋고. 왠지 더 당당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텔러는 원래 무기계약직이었는데 P은행에서는 몇 년 전 대대적으로 텔러의 정규직 전환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아직 무기계약직인 은행들도 많아서 텔러는 정규직이 아니라는 인식이 강한 데다 연봉도 비교적 낮은 편이라 조금 위축된다는 의미로 말한 것 같다.

갑자기 예전에 소개팅으로 만났던 무례한 중학교 국어교사가 떠올랐다. 


“띠리링”


현서의 핸드폰이 울렸다.


“네, 어머니. 안녕하세요.”


현서가 핸드폰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어머, 시어머니?”


진주가 현서에게 입모양으로 말하며 나머지 두 명과 마주 보았다.


“결혼 전인데 벌써 전화를 하신단 말이야? 그것도 주말 저녁에?”

“현서네 시월드도 장난 아닐 것 같지 않아?”

“얘기 들어보니까 보통 아니신 것 같아. 그래도 잘 사는 시댁이라니 부럽긴 하다. 집 값이 얼만데.”


동기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하며 현서의 자리에 놓인 갈색의 C사 가방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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