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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찹쌀경단 Nov 29. 2022

멋진 시어머니도 있다

P은행 다니는 직장여성 최민경입니다 11

“딩동”


“오래 기다리셨죠? 제가 처리해드리겠습니다. 어떤 업무이실까요?”


민경이 자리에 앉아 대기번호를 호출하자 60대 후반쯤 되는 중년 여성이 통장지갑을 들고 왔다.


“통장 정리 좀 해 주시고요, 미국으로 돈 좀 송금하려고요.”

“네, 통장 주시면 정리해드릴게요.”


지직-지직

통장 프린터기 안에 통장을 집어넣자 오래된 인쇄소에서 날 것만 같은 소리가 나며 통장에 기록이 찍힌다.


젊은 사람들은 스마트뱅킹을 주로 이용하지만 중장년층의 고객들은 아직도 통장을 들고 직접 영업점을 찾아오곤 한다.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으로 조회하면 다 나오는 거래내역을 아직도 통장정리를 통해 확인하는 것이다. 스마트뱅킹을 배워서 활용하면 굳이 직접 안 나와도 되니 편리할 텐데 싶어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한편, 민경은 나중에 본인도 점점 발전하는 기술을 따라가지 못하고 도태되면 어떡하지 싶은 생각도 든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보면 나도 나이를 먹고 있구나 싶어 씁쓸하면서도 어르신들이 급변하는 세상에 적응하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드려야겠다는 다짐도 하게 된다.


“이만 달러만 여기로 좀 보내줘요.”

“네, 고객님. 혹시 어떤 목적으로 송금하시는 건가요?”


고객이 해외로 자금을 송금해달라고 할 때는 송금 목적을 확인 후 그에 맞는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간혹 '내가 내 돈 보낸다는데 어디로 얼마를 보내든 은행에서 무슨 상관이냐'며 화를 내며 이해하지 못하는 고객들도 있다. 고객 입장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금융당국에서는 은행으로 하여금 외국환 거래규정을 통해 무분별한 외화반출을 막고 목적에 맞는 만큼만 송금을 하여 외화를 관리하게 하고 있다. 은행에서는 이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화가 잔뜩 난 고객에게 설명하는 일이 종종 일어나는데 오늘 온 고객은 까칠하지 않아 다행이란 생각을 해 본다.


“우리 손녀딸 학비예요. 이번에 뉴욕 주립대에 들어갔거든요. 너무 기특해서 이번 학비는 내가 내주겠다고 했어요.”

“어머, 멋진 할머니세요. 손녀 분도 할머니가 이렇게 학비까지 내주시니 너무 좋아하겠네요."


“평생 모은 돈 이럴 때 쓰지 늙은이가 언제 또 돈 쓰겠어요. 죽을 때 돈 싸들고 갈 것도 아닌데. 첫 손주인데 똘똘한 데다가 착하기도 얼마나 착한지. 아주 이뻐 죽겠어요. 우리 아들 며느리가 교육을 잘 시켰지요. 며느리가 결혼하면서 직장도 그만두고 손녀 교육에 올인했는데 이렇게 좋은 결과가 나와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어머 그러셨군요. 가족들이 다들 자랑스러워하겠어요."


"우리 며느리가 원래 방송국 기자였거든요. 내가 평생 전업주부로 살아서 딸이나 며느리는 꼭 자기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우리 며느리가 아주 예쁘고 똑똑한데, 내가 육아 도와줄 테니 그 힘들게 들어간 좋은 직장 절대 그만두지 말라고 했어요. 근데 우리 손녀가 세 살 때쯤 어린이집에서 큰 문제가 있었어요. 거기 선생이 우리 손녀랑 애들한테 간식에 수면제 타서 맥이고 억지로 낮잠을 재웠었거든요.”


“세상에. 뉴스에 가끔 나오잖아요. 손녀분이 직접 겪었으니 얼마나 놀라셨어요.”

“우리 며느리가 그거 알고 방송에서 보도하고 아주 난리 났었지요. 그러고 나서 안 되겠다 싶었는지 얼마 후에 직장 그만두고 직접 손녀 돌본다고 하더라고. 사표 내고 온 날 아주 펑펑 울더라고요. 내가 괜히 직장 계속 다니라고 해서 우리 손녀가 험한 꼴 당했나 싶어서 미안하기도 하고 마음이 참 안 좋더라니까.”

“에이, 그런 생각은 하지 마세요. 며느님이 직장을 다녔든, 안 다녔든 자격 미달의 이상한 선생이 있었던 거니까요.”


“내가 그때 생각만 하면 우리 며느리랑 손녀한테 좀 많이 미안하지. 근데 며느리가 손녀를 이렇게 훌륭하게 잘 키워내서 고마울 뿐이지요. 나는 내가 힘닿는 데까지 우리 손녀랑 며느리 챙겨주려고 그래요. 여름방학엔 둘이 가까운 데 여행이라도 다녀오라고 우리 며느리 비행기 표나 끊어줄까 싶어요.”

“아드님은 어쩌고요, 사모님. 하하”


“우리 아들은 내가 안 챙겨도 지가 알아서 잘해요. 휴가 맞으면 같이 가겠지 뭐. 며느리가 손녀 키우면서 내조 잘해서 아들 일도 잘 풀린 거라 나는 며느리랑 손녀만 챙겨도 돼요. 호호”

“멋진 시어머니이고 할머니이시네요. 며느님이랑 손녀분이 너무 좋아하겠어요.”


“내가 며느리한테 잘해줘야 우리 아들이 집에서 대접을 받고 그 집에 평화가 와요. 괜히 며느리 귀찮게 하고 힘들게 하면 안 돼요. 아들 가졌다고 유세 부리는 시대는 끝났지. 나같이 늙어가는 입장에서는 애들 안 싸우고 행복하게 잘 사는 모습만 보면 그게 행복이고 효도거든. 아가씨는 결혼했어요?”

“아뇨, 저 미혼이에요.”

“애인은 있고?”

“네, 있긴 해요.”


“내가 오지랖 같기도 하고, 또 겪은 일이 있어서 이런 얘기하기가 조심스럽긴 한데, 좋은 직장 다니고 있으니까 결혼하고 나서 쉽게 그만둘 생각은 안 했으면 해요. 우리 손녀한테 그런 일만 없었어도 아마 우리 며느리 지금 방송국에서 엄청 잘 나갔을 거야. 본인도 많이 아쉬워하지만 손녀가 잘 자라준 것으로 위안을 삼고 있어요. 요즘은 또 옛날이랑 다르니까, 직장 다니면서도 아이 잘 키울 수 있을 거야. 요즘 남자들은 육아에 참여도 많이 한다더라고. 여자도 자기 일이 있어야 해. 내가 살아보니까, 여자들이 전업주부로만 지내기엔 너무 아까워요.”


단순히 송금하러 온 고객과 어쩌다 보니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민경은 저 연세에 저렇게 깨어있는 분이 있을 수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껏 주변에서 들어온 시어머니와는 너무 다른 모습에 신선한 충격을 받고, 결혼에 대해, 그리고 시부모와의 관계에 대해 너무 편견을 가질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도 슬쩍 들었다.


만약 내가 저 며느리의 입장이었다면 나도 당장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정했을까 생각해보니, 참으로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민경은 자녀를 낳고 키운다는 게 어떤 것인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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