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뇨 전 뚱이인데요?

출간된 책의 오타마저 사랑하게 된 어느 작가의 인간 증명

by 배재윤

인스타에서 재밌는 사고실험을 한 적이 있다. 작가라는 정체성을 증명하듯 정성스럽게 찍은 책의 한 페이지와 짧은 소감문을 올린다. 그리고 제자와 나눈 지극히 사적인 어쩌면 조금은 실없는 카카오톡 대화 캡처본을 슬쩍 던져둔다. 사람들의 열광적인 반응은 당연히 후자였다. 즉 대중의 관심은 인간의 내밀한 사생활과 틈새를 파고드는 서사에 압도적으로 쏠린다.

진짜 흥미로운 지점은 그다음이었다. “어떤 콘텐츠가 더 좋았나요?”라는 질문을 던진 설문 조사에 나는 장난 삼아 선택지 하나를 덧붙였다. 애니메이션 <스폰지밥>의 유명한 밈, “아뇨, 전 뚱이인데요?”였다. 질문의 맥락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고, 논리적으로는 오답에 가까운 이 엉뚱한 문구에 사람들은 다시 한 번, 폭발적인 지지를 보냈다. 체계적인 답변보다는 그저 밈 하나에 반응하는 대중을 보며 인간이 얼마나 비논리적인 자극에 취약한 존재인지 새삼 실감했다.

확실히 세상은 변했다. 인스타그램은 텍스트를 정독하는 공간이 아니다. 사람들은 짧은 숏폼 콘텐츠와 찰나의 도파민을 얻으려 이곳을 찾지, 누군가의 체계적인 사유 과정을 함께하며 기쁨을 느끼려 하는 사람은 대단히 적다. 애초에 그런 독자 한 명을 위해 글을 쓴다고 다짐을 해서 여기까지 끌고 왔지만, 여기서 나는 근본적인 의문에 직면한다. “나는 작가인데, 읽히지 않는 내 글을 많은 대중들에게 읽히도록 하려면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활자 뒤에 숨지 말고 정돈된 일상의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워야 할까? 아니면 카메라 앞에서 노래라도 불러야 할까? 진중한 작가의 모습이 아니라 자극을 쫓는 1인 콘텐츠 크리에이터가 되어야만 이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일까. 나의 정체성이 텍스트와 숏폼 그리고 작가와 광대 그 어딘가에서 이리저리 흔들린다.


이러한 정체성의 혼란은 비단 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보수적일 것만 같은 출판계의 거물, 민음사가 운영하는 유튜브 <민음사 TV>의 행보는 굉장히 상징적이다. 그들은 채널을 시작하며 파격적인 선언을 했다. “출판사 유튜브지만, 책 광고는 만들지 않겠다.”

실제로 대중이 열광한 것은 고결한 저자의 인터뷰가 아니었다. 마케팅부 직원이 사무실에서 신는 슬리퍼나 즐겨 먹는 간식, 신입사원 시절의 처절한 실수담, 그리고 “오늘 점심 뭐 먹지?”를 고민하는 지극히 평범하고도 구차한 일상이었다. 독자들은 정돈된 활자 너머에 있는 사람의 냄새를 맡기 위해 모여들었고 그 유대감은 역설적으로 그들이 만드는 책에 대한 신뢰로 이어졌다.


대중이 이토록 인간적인 빈틈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브리튼즈 갓 탤런트>에서 빈체로를 외친 인간 폴 포츠의 사례는 그 답을 명확히 보여준다. 냉정하게 말해, 성악 전공자들에게 그의 실력은 잘 부르는 아마추어 수준으로 평가받는다. 만약 그가 정규 성악 콩쿠르에 나갔다면 예선 탈락의 고배를 마셨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전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고 500만 장의 음반을 팔아치웠다.

그를 완성한 것은 완벽한 발성이 아니라 그의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서사 덕분이다. 4분 10초라는 짧은 무대 뒤에 숨겨진 핍박받는 주인공의 삶, 위대한 도전, 그리고 아무도 예상치 못한 승리. 그 드라마틱한 이야기 속에서 그의 고르지 못한 치열과 저렴한 양복은 폄하의 대상이 아닌 독자를 몰입시키기 위한 필수적인 장치였다.

결국 사람들은 완벽한 결과물이 아닌 그 결과물을 만들어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불완전한 인간에게 마음을 연다.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던 나는 여기서 한 가지 힌트를 얻었다. 어쩌면 내가 숨기고 싶어 했던 나의 허점과 사소한 일상들이야말로 인공지능이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유일한 상품이 아닐까 말이다.



문제는 이제 이 인간적인 서사야말로 인공지능이라는 거대한 파도 속에서 우리가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하고도 절박한 무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생성형 AI의 등장은 글을 쓰는 행위만으로는 더 이상 작가로서의 고유성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하다. 소설가 장강명은 저서 <먼저 온 미래>에서 섬뜩한 경고를 던진다. 인공지능이 문학 출판계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는 날이 오면 인간 소설가의 영역은 기계가 하지 못하는 일로 축소될 것이라고. 그때 우리가 팔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기계가 결코 가질 수 없는 것 바로 “나의 사생활”뿐이라는 아주 서늘하고 무시무시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미 우리는 이러한 역습을 바둑계에서 목격했다. 2016년 알파고의 등장 이후 바둑은 AI가 정복한 영토가 되었다. 조한승 9단은 이 현상이 머지않아 예술계 전반으로 퍼질 것이라 예측한다. 그는 이제 소설가라 할지라도 대중 앞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의 인터뷰 내용대로 “온라인 대국에서 상대가 인공지능을 썼는지 판단하기 어렵듯, 앞으로는 이 원고를 정말 사람이 썼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입증해야 하는 시대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장강명 작가가 이 통찰을 내놓은 지 고작 1년 남짓 지났을 뿐이지만, 변화의 속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이제 AI는 인간의 목소리를 흉내 내어 노래를 부르고, 실사와 구분이 가지 않는 광고 영상을 순식간에 찍어낸다. 내가 최근 인스타그램에 올린 <잘했고 잘하고 있고 잘할 거야>라는 위로의 노래가 실은 AI 창작물이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듯, 이제 디지털 세상의 모든 정보는 인간인지 아닌지 의심하는 대상이 되었다.

“이 글은 정말 당신이 쓴 것입니까?”라는 질문에 우리는 무엇으로 답해야 할까. 원고의 질이 아닌 내가 이 원고를 쓰기 위해 보낸 고통의 시간과 구차한 일상을 대중들에게 기꺼이 보여줘야 한다. 즉 인간으로서의 존재의 증명이 원고 자체보다 중요해진 역설적인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제 작가는 단순히 문장을 짓는 자를 넘어서, 자신이 진짜 인간임을 입증해야 하는 인간 증명의 최전선에 서야 할지도 모른다.


AI가 바둑을 정복하고 지브리 스튜디오의 화풍을 손쉽게 재현해내듯, 논리적으로 완결된 글쓰기 또한 머지않아 인공지능의 영토가 되리라는 공포 섞인 예측이 들린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근본적인 질문 앞에 서게 된다. 만약 내가 AI와 수천 번의 대화를 주고받으며 문장을 다듬고, AI의 아이디어를 빌려 한 편의 글을 완성했다면 이 글의 주인은 누구인가?


예컨대 AI에게 농구를 주제로 에세이 한 편을 써달라고 부탁한다고 가정해 보자. 녀석은 분명 완벽하진 않아도 제법 ‘그럴싸한’ 결과물을 내놓을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그럴싸하다’는 데 있다. 문장의 호응이 어긋나거나 어딘가 교과서적인 인공지능의 냄새가 풀풀 풍길 수밖에. 하지만 인간이 그 어색한 틈을 메우고 수십 번 퇴고해 완성도를 끌어올린다면 어떨까? 꽤 괜찮은 문장으로 탈바꿈한 이 글을 두고 우리는 누구의 것이라고 정의해야 하는가.

창작과 편집의 경계는 이미 안갯속으로 사라졌다. 오로지 인간 창작자만을 기준으로 삼는 저작권법은 이 모호한 지점에서 길을 잃었다. AI가 0.1초 만에 조립해 낸 문장들을 창작으로 인정할지 말지 엄숙하게 고민하지만 정작 글을 쓰는 우리는 이미 AI와 공생을 넘어선 공범의 단계다. 이 복잡한 법적 논쟁 속에서 작가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누가 이 글을 썼느냐”는 준엄한 질문에 그저 뚱이처럼 “아뇨, 전 뚱이인데요?(그냥 제가 쓴 건데요?)”라고 무해하게 웃으며 버티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완벽한 법적 근거보다 중요한 건 그 문장 속에 깃든 나의 비논리적인 고집이니까.

이러한 현실 속에서 장강명 작가는 묻는다. 미래의 출판사가 드라마틱한 인생 스토리가 있는 신인을 발탁해 AI 편집자와 함께 원고를 빚어내는 것이 표준이 된다면 우리는 그것을 여전히 ‘인간의 문학’이라 부르며 사랑할 수 있을까?



만약 내가 이 글의 일부는 AI가 쓴 문장이라고 고백한다면 과연 어느 독자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나의 사고인지 칼로 베듯 가려낼 수 있을까. 이미 우리는 문장 뒤에 숨은 인간의 흔적을 감별할 판별력을 잃어가고 있다. 앞으로 시중에 출간되는 책들은 오로지 인간의 머리에서 100퍼센트 나온 것인지 아닌지 결코 구분할 수 없을 테다.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 대형 로펌 회사들은 신입 어소시에이트 변호사, 줄여서 어쏘를 교육시키기보다 신입이 할 일을 AI에게 시킨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컴퓨터 공학은 그 자체로 공학의 성역으로 추앙받았지만 이제는 생성형 AI 때문에 프로그램 개발자조차 실직을 걱정해야 하는 시대다.

이러한 판단의 불가능성은 교육 현장에서도 기괴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학생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학교생활기록부(학생부)다. 최근 교육부는 학생부 작성 시 생성형 AI 활용에 관한 지침을 내려보냈다. 그 내용은 실소를 자아낼 만큼 모순적이다.


“AI를 사용하는 것은 상관없으나, 만약 학생부 기재 내용에 문제가 생기면 그 책임은 전적으로 교사에게 있다.”


이는 교육 당국조차 AI가 쓴 문장을 판별할 능력이 없음을 자백하는 셈이다. 흐름을 막을 수 없으니 허용하되, 사고가 나면 개인의 도덕성 탓으로 돌리겠다는 논리. 마치 집게리아에 전화를 걸어 “거기 집게리아죠?”라고 묻는 고객에게 “아뇨, 전 뚱이인데요!”라고 대답하며 수화기를 내려놓는 뚱이의 태도와 닮아 있다. 대답은 들었으나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고 황당함과 책임 전가만 남는 이 상황. 교육이라는 공공의 영역조차 기술의 침투 앞에 판별력을 상실한 채 오로지 책임은 교사 개인의 몫으로 남겨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참 모순적이게도 교육청은 교사들에게 AI 연수를 독려하며 효율성을 강조하는 현실이다. 하지만 그 결과물에 대해서는 “AI가 몇 퍼센트 기여했는지 알 길 없으니 알아서 살아남으라”며 발을 뺀다. 결국 효율은 기술이 가져가고 고뇌와 책임은 오롯이 인간의 몫으로 남는다. 이제 교사는 혹은 글을 쓰는 모든 이는 단순히 문장을 짓는 자를 넘어서, 이 문장이 정말 나의 진심에서 발현된 것임을 증명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정부가 “생성형 AI를 아예 못 쓰게 막으면 되지 않느냐”라고 묻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순진한 질문은 이제 접어두는 편이 좋다. 예금 통장 하나를 만드는 일을 떠올려보자. 누구나 스마트폰을 켜고 1분이면 개설하는 시대지만, 슬프게도 우리 어머니는 여전히 은행 창구로 직접 향하신다. 컴퓨터 전원을 켜고 스크롤바를 내리는 법조차 모르는 어머니에게 디지털의 편리함은 남의 나라 이야기다. 하지만 세상은 어머니의 속도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토스를 이용해 송금하지 않고 은행에서 직접 돈을 송금하는 사람이 비효율의 상징이 되었듯 스마트폰과 숏폼 콘텐츠가 공기처럼 당연해진 이 흐름을 인간이 결코 막을 수 없다는 뜻이다.

과거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종교개혁의 불씨가 되었듯, AI라는 파도는 이미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를 바꿨다. “그런 간단한 보고서를 직접 쓴다고? AI한테 맡기면 그만인데?”라는 현실의 비아냥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머지않아 우리는 이런 무시무시한 소리를 듣게 될지도 모른다. “누가 요즘 책을 돈 주고 사서 읽어? AI한테 써달라고 하면 내 취향에 맞는 작품 300편은 순식간에 쏟아내는데.”

결국 사용하지 않는 자는 도태된다. 교육부조차 학생부가 교사의 손끝에서 나온 것인지 기계의 회로에서 나온 것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시대. 우리는 도구의 편리함에 중독되어 가는 동시에 인간 고유의 영역이 지워져 가는 서글픈 풍경을 목도하고 있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현재의 AI가 아직은 생성형이라는 틀 안에 갇혀 있다는 점이다. 질문자의 수준에 따라 답변의 질은 천차만별이며, 여전히 창의적 발상보다는 질문자가 원하는 정답을 그럴싸하게 조립해 내는 데 그친다. “한강 작가처럼 소설을 써줘”라는 요청에 노벨 문학상 수준의 걸작을 내놓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문학적 수준이 아니라 무분별한 범람에 있다. AI가 그럴싸한 글들로 채워진 책 한 권을 단 한 시간 만에 뱉어내는 시대. 만약 누군가 이런 식으로 100권의 책을 하루 만에 순식간에 출간한다면 어떻게 될까? 국가의 국립중앙도서관은 법적 의무에 따라 이 무가치한 콘텐츠의 잔해들을 반드시 사들여야 할 법적인 책임이 있고 서점가는 유통되는 쓰레기들로 몸살을 앓을 것이다. 이 거대한 세금이 새어 나가는 구멍을 막을 물리적 방법은 현재로선 없다.

상상을 조금 더 보태보자. 머지않은 미래에 AI가 정말 한강 작가 같은 베스트셀러를 하루에 수백 편씩 찍어낸다면 수천 년간 이어져 온 책이라는 콘텐츠는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4세기에 등장한 최초의 신약성서 시나이 사본(Codex Sinaiticus)은 낱장의 소가죽을 겹쳐 줄로 묶어 만든 오늘날 우리가 아는 넘겨보는 책의 원형이었다. 그로부터 1,600년이 흐르는 동안 책은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남았다. 텔레비전과 라디오, 영화의 등장에도, 도서관을 잿더미로 만든 두 차례의 세계대전의 참화 속에서도 책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그 끈질긴 미디어가 근본적인 기능 상실의 위기에 처했다. 지식과 경험의 체계적 전달이 책의 목적이라 할 때, 단 한 마디 명령으로 전문가 수준의 베스트셀러와 요약본을 만들어내는 AI가 등장한다면 인간의 집필은 무슨 가치를 지닐 수 있겠는가.



기계적 완벽함이 기본값이 된 시대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역설적으로 더욱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무언가를 찾는 일이다.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비논리의 자리를 지키는 것. 미래의 인공지능이 결코 복제할 수 없는 실패와 오류의 서사를 기록하는 것. 그것이 1,600년을 버텨온 책이 앞으로 맞이할 새로운 운명이자, 작가인 내가 가야 할 길이다.

우리는 왜 여전히 사람에게 열광하는가. 예능 <1박 2일>에서 대중이 인간 이승기에게 매료되었던 건 그의 완벽한 외모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 이면에 숨겨진 빈틈, 이른바 허당끼가 그를 살아있는 인간으로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천만 관객을 앞둔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흥행 뒤에는 영화 감독이자 인간 장항준이 가진 특유의 털털함과 삶을 대하는 낙천적인 태도가 자리 잡고 있다. 대중은 콘텐츠의 질만큼이나 그 콘텐츠를 만든 인간의 온도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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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록키>를 보라. 120분의 상연 시간 중 실제 권투 경기 장면은 채 10분도 되지 않는다. 나머지 시간은 록키가 그 경기를 준비하며 자기 자신과 주변 환경이라는 거대한 적수를 상대로 고군분투하는 과정으로 채워진다. 관객은 그가 흘린 땀방울과 짓이겨진 자존심을 극복하여 얻은 록키의 승리에 비로소 큰 쾌감을 느낀다. 완벽함이란 결과만 내놓는 인공지능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과정의 미학이다.



AI는 결코 배재윤이라는 인간의 삶 그 자체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학교 폭력의 그늘을 지나 작가가 되기 위해 브런치 작가 신청에 13번이나 떨어지고, 남들 보기엔 화려하지 않은 기간제 교사 자리에 도전하며 고군분투했던 그 치열한 시간들을 인공지능이 어떻게 그럴싸하게 꾸며낼 수 있겠는가.

나는 이제 내 저서 <수학이 건네는 위로> 속에 남겨진 사소한 오류들을 사랑하기로 했다. 모두가 잠든 새벽, 충혈된 눈으로 교정지를 넘기며 수만 개의 활자 사이를 유영하던 시간들을 기억한다. 차갑게 식은 커피와 모니터의 푸른빛이 뒤섞인 그 고독한 사투 끝에서도 결국 틈새는 생겨났다. 로그 기호를 영어 알파벳 대문자 엘이 아닌 대문자 아이로 표기한 실수. 현직 수학 선생님조차 눈치채지 못할 만큼 수라는 단어를 숫자로 잘못 표기한 그 미세한 오탈자 앞에서 나는 나의 결점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한참을 유영하며 헤매고 있었다.

하지만 기묘하게도 그 실수가 곧 형용할 수 없는 해방감으로 변했다. 수천 번의 연산 끝에 1+1=2.000000이라는 결벽증적인 답안만을 내놓는 AI는 결코 저지르지 않을 오직 인간이기에 허락된 귀여운 실패였기 때문이다. 그 오타는 편집 과정의 부주의가 아니라, 밤을 지새우며 문장 하나하나에 영혼을 갈아 넣던 한 인간이 남긴 뜨거운 지문이자, 내가 살아있는 작가임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낙인이었다.


나는 결점 없는 매끄러운 문장보다, 차라리 1+1을 3이라 써버리고 얼굴을 붉히는 나의 부끄러움을 더욱 사랑한다. AI가 정답의 영토를 넓혀갈 때 나는 기꺼이 오답의 숲으로 걸어 들어가 나만의 비논리적인 흔적을 남기려 한다.



결국 자신의 취약성을 기꺼이 드러내고 인정하는 것. 그것이 인공지능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예술이다. 알고리즘의 치밀한 연산이 어찌 인간이 생의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키려는 숭고한 동기를 가늠할 수 있겠는가. 머지않은 미래, 어느 매끈한 지능을 가진 AI가 내 앞에 나타나 이렇게 물어올지도 모른다. “당신은 무결점 글쓰기를 보여주는 작가입니까?” 나는 세상에서 가장 유쾌한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아뇨? 전 뚱이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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