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2차원 뒤에 숨어 썩어가는 진실을 직시할 용기
폴 세잔은 사과 하나를 그리기 위해 백 번 넘게 붓질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캔버스 위에서 사과는 영원히 시들지 않는 불멸의 존재가 된다. 사람들은 그 박제된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찬사를 보내지만, 우리가 망각하는 사실이 하나 있다. 정작 세잔이 캔버스 앞에서 견뎠던 시간은 사과가 서서히 갈변하고 썩어가는 3차원의 시간이었다는 점이다. 화가는 부패하는 실재를 온몸으로 통과하며 본질을 붙들려 했으나, 정작 캔버스에 남는 것은 철저히 기획된 앞면뿐인 2차원의 평면이다.
어떤 이의 세계는 때로는 정교한 캔버스 속 정물화가 된다. 자신의 삶은 조금씩 무너지고 있는데도 난 사실 아무렇지 않다며 여유로운 일상이 담긴 2차원 사진을 SNS라는 거대한 전시장에 박제한 후, 이제야 인생을 통달한 어른이 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이 일상은 사실 입체적인 고통을 평면적인 우아함으로 납작하게 눌러버린 하나의 슬픈 알리바이다.
나 역시 그 프레임 안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나의 전시장인 브런치에 올린 글에 댓글이 아예 달리지 않으면 내 문장의 가치가 부정당한 것 같은 수치심에 서둘러 글을 삭제했다. 인스타그램의 좋아요 숫자를 숨기며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나의 초라함을 은폐하려 필사적이었다. 숫자가 곧 나라는 착각 속에서 세잔의 사과처럼 서서히 썩고 갈변하며 깊어질 내 문장의 시간은 철저히 배제되었다.
이와 달리, 어느 드라마 속 주인공은 쌓여 있는 소주병을 치우는 일을 내 무덤에서 내가 일어나 벌초하는 일처럼 암담하다고 고백했다. 진짜 정직한 사람은 이처럼 자신의 밑바닥이 얼마나 엉망인지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는 발 디딜 틈 없이 쌓인 소주병 더미에서 빠져나와 그것들을 하나, 둘, 치우기 시작한다. 찐득하게 눌어붙은 방바닥의 알코올 얼룩을 걸레로 박박 문지른다. 무거운 팔을 들어 자신의 비참한 현실의 얼룩을 박박 긁어낼 때 손톱 밑으로 파고드는 그 쓰라린 통증이야말로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일임을 그는 알기 때문이다.
제 발로 무덤 같은 방을 치우기 시작하는 이는 비로소 진짜 비참함과 대면할 용기를 얻은 자다. 하지만 2차원 캔버스 속에 갇혀 사는 이는 다르다. 그는 오로지 캔버스 앞면의 그 박제된 정돈함에만 집착한다. 형식이 치밀해질수록, 그 비좁은 프레임 안에 갇힌 진실은 환기되지 못한 채 서서히 고여갈 뿐이다. 심리학적으로 위태로운 지점은 바로 여기다. 전시된 이미지와 실제의 자아를 혼동하는 순간 영혼의 환기는 멈춘다. 불안을 섬세한 감수성이라 포장해 가둬두면 생각은 고여서 썩기 마련이다. 비극은 여기서 시작된다. 정작 방 주인은 자신의 코가 마비되어 악취를 맡지 못한다. 이들의 예민함은 타인을 위한 안테나가 아니다. 오로지 자신의 상처만 감싸기 위해 세운 가시덤불일 뿐이다.
주방에서 알리오올리오를 요리하던 중 핵심인 페페론치노를 빠뜨렸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을 가정해 보자. 정직한 요리사라면 불을 끄고 고추를 다시 볶거나 투박한 맛 그대로를 즐기겠지만, 캔버스 속에 사는 이는 다르다. 그는 요리의 맛보다 이 요리를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라는 명명법에 골몰한다. 스마트폰을 켜서 페페론치노 없는 알리오올리오를 부르는 근사한 이탈리아어 명칭이 있는지, 혹은 이것을 ‘오일 소스 스파게티’로 명명해야 자신의 전문성이 훼손되지 않을지를 검색하며 귀중한 시간을 허비한다.
검색창을 두드리는 그의 손가락은 분주하지만, 정작 식탁 맞은편에서 배고픔에 지쳐가는 이의 눈빛은 철저히 소외된다. 그의 결벽은 타인을 향한 배려가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완벽한 이미지가 손상되는 것을 막기 위한 방어기제이기 때문이다. 알맹이 없는 삶에 근사한 이름을 붙이기 위해 평생을 허비하는 이 닫힌 세계에서 요리는 차갑게 식어가고 식사를 나누는 온기는 증발한다. 본질이 빠진 접시 위에서 이름이 무엇인들 무슨 소용인가. 뭐가 되었든 허기를 채우기 위한 정성이며, 맛있게 나누면 그뿐인 김이 모락모락 나는 파스타일 뿐인데 말이다.
세잔은 결국 썩어가는 사과를 견디지 못해 밀랍으로 만든 가짜 과일을 가져다 놓기도 했다. 썩지 않는 가짜를 보며 진짜의 본질을 찾겠다는 모순. 어쩌면 우리 주변에도 수많은 밀랍 사과들이 존재할지 모른다. 한 사람을 자세히 보겠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그가 건넨 식물의 이름조차 모르는 무관심. 그러고는 그 차가운 무관심을 ‘상대를 존중해서 거리를 두는 것’이라고 포장하는 핑계들 말이다. 본질을 들여다볼 용기가 없는 이들이 내세우는 존중이란 결국 썩어가는 사과를 가리기 위한 가장 저렴한 덮개에 불과하다. 이들은 상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비추는 거울에 비친 존중하는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고 있을 뿐이다. 그 거울 속에는 타인의 얼굴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러니 자기 세계에 갇히지 말자. 진짜 어른이 된다는 것은 2차원의 캔버스에서 3차원의 불완전한 현실로 기어코 걸어 나오는 일이다. 내가 그린 내 모습이 사실은 얼마나 비좁은 세계였는지, 나의 다정함이 사실은 타인의 에너지를 갈구하는 허기였음을 직시하는 비참함을 견뎌야 한다.
사과의 뒷면이 썩어 있다면 그것을 감추기 위해 썩지 않은 앞면을 전시하며 숨을 것이 아니라, 그 부분을 정직하게 도려내야 한다. 가짜를 붙들고 있는 한 생각의 부패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도려낸 자리는 움푹 패어 볼품없을 것이다. 매끄러운 원형은 무너지고 칼이 지나간 자리는 공기와 만나 거뭇하게 갈변될 것이다. 그러나 그 흉터야말로 이 사과가 살아있다는 가장 정직한 증거다. 썩은 부분을 도려낸 사과는 비로소 전시용 정물이라는 감옥에서 해방되어 누군가의 식탁 위로 올라간다. 흉터 난 자리를 서로 마주 보며 앉은 이들이 그 울퉁불퉁한 조각을 나누어 씹을 때, 박제된 우아함이 주지 못했던 생생한 온기가 혈관을 타고 흐르기 시작한다. 서로의 비참함을 고백하고 도려낸 자리를 확인하며 나누는 그 투박한 식사야말로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고결한 형태의 연대다.
완벽해 보이는 캔버스 속의 정물로 남아 악취 속에 죽어갈 것인가. 아니면 캔버스를 찢고 나와 흉터 난 진실을 마주하며 다시 살아갈 것인가. 흉터가 난 사과는 더 이상 전시용이 될 순 없지만, 누군가의 허기를 채워줄 진짜 양식이 된다. 선택은 언제나 캔버스의 주인에게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