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과생의 평론
주인공 이명준이 자살한 이유는 결국 뭘까? 다각도에서 생각해보았다.
(1) 이데올로기와 자신의 이상과의 괴리감에서 오는 밀실의 파괴
(2) 환각과 푸른광장(바다)으로의 충동
(3) 은혜와의 사랑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구
크게 이 세 가지 마음이 서로 합동작용을 이루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
먼저 (1)의 측면은 남북한 어디에서도 제대로 된 광장과 밀실을 찾지 못했을 때 발생했다. 이명준은 처음에 자신이 뿌리 내릴 만한 ‘광장’을 찾고, ‘밀실’ 또한 안전하게 지키려는 열의에 차있었다. 그러나 ‘경찰서 사건’을 계기로 남한의 정치나 세상 돌아가는 것에 완전히 관심을 끄고 만다. 북한에 있는 아버지 때문에 빨갱이로 오해를 받아 경찰서에서 심문을 받고 난 후, 남한에서 그의 삶은 무너진다. 남한에서 ‘밀실’만은 자유를 보장받을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나의 방문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렇게 튼튼하리라고 믿었던 나의 문이 노크도 없이 무례하게 젖혀지고, 흙발로 들이닥친 불한당이 그를 함부로 때렸다.” 그는 ‘고요한 무너짐’을 듣고 있었다. 의지할 데 없어진 명준은 윤애에게 의지하지만, 윤애는 자신의 생각대로 고분고분하지는 않다. 명준은 새로운 광장을 찾아 북한으로 건너간다. 그러나 공산 이데올로기의 광장마저 자신의 기대를 배반한다. 그가 또 한번 무너지는 계기는 ‘자아비판회’였다. 북한의 신문사에서 기자생활을 하던 명준은 ‘조선인 꼴호즈 기사’를 썼다가 반동분자라는 비판을 공개적으로 받게 된다. 그는 진심과는 달리 요령을 부려 잘못을 뉘우치고 당에 충성을 바치는 척 한다. 그러고서 그는 또다시 밀실이 무너짐을 느꼈다.
“명준은, 어떤 그럴 수 없이 값진 ‘요령’을 깨달은 것을 알았다. 슬픈 깨달음이었다. 알고 싶지 않았던 슬기였다. 그는 가슴에서 울리는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이번 것은 더 큰 울림이었다. 무디게 울리는 소리. 광장에서 동상이 넘어지는 소리 같았다.”
이명준은 광장과 밀실 둘 다 취하고자 했으나 그건 이상적인 판타지일 뿐이었다. 그에게는 광장과 밀실을 개혁할 의지도 없었다. 그는 ‘나팔수’가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명준은 평범한 사람이 되길, 자기만의 ‘한 뼘의 광장’이라도 보장되길 바랬지만, 남한과 북한 그리고 중립국으로 가는 타고르호 그 어디에서도 그것은 지켜지지 않았다. 타고르호에 같이 탄 포로들조차 명준을 괴롭게 했다. 이명준은 끝내 밀실까지 파괴되었다. 제3의 중립국에서는 밀실을 지킬 수 있으리라고 잠시 희망을 품었지만, 현실적으로 힘들 것이라는 걸 알았던 걸까? 이런 괴로움이 그가 자살하기 위한 불안정한 심리상태를 북돋았던 것 같다.
(2)의 측면에서 보면 이명준은 (1)의 불안정한 심리로 인해 자주 환각을 느끼는 상태였다. 아니, 그전에도 신내림과 같은 환각은 계속 그를 따라다녔다.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기시감을 느끼면서 마치 세상이 멈춘 듯한 느낌을 받고난 후, 그는 그걸 ‘신내림’이라고 부른다. 신내림 같은 환각은 이명준이 고독함을 느끼거나, ‘누리’에 대한 무언가 깨달음을 얻을 때 갑자기 찾아온다. 이명준이 평양에서 야외극장 짓는 공사장에서 일하던 날에도 갑자기 환각이 찾아온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까마득했다. 좋은 철이 곧 올 터이었다. 좋은 철. 오래 잊었던 일이 번개같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아뜩하는 참에 발을 헛디디면서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이 순간 이명준은 신내림 때와 같은 아찔한 어질머리를 느낀 것이 아닐까.
이 사건은 자살의 복선과 같은 기능을 한다. 그가 자살할 때도 그 신내림이 데자뷰처럼 떠오른다. “내 딸아. 비로소 마음이 놓인다. 옛날, 어느 벌판에서 겪은 신내림이, 문득 떠오른다. 그러자, 언젠가 전에, 이렇게 이 배를 타고 가다가, 그 벌판을 지금처럼 떠올린 일이, 그리고 딸을 부르던 일이, 이렇게 마음이 놓이던 일이 떠올랐다. 거울 속에 비친 남자는 활짝 웃고 있다.”
신내림이란 이명준의 자살에 좀더 개연성을 주기 위한 장치이자, 어떤 ‘득도’와 같은 순간이다. 자살하기 직전 명준의 마음은 도리어 평화로워지고, 온 누리의 이치를 싸 안듯 이승을 초월하게 된다. 반복되는 환각과 신내림은 이명준이 현실의 사람이기보다는, 몽환적이고 둥둥 떠있으며, 어디로 가버릴 것만 같은 인상을 주었다. “그는 지금, 부채의 사북자리에 서 있다. 삶의 광장은 좁아지다 못해 끝내 그의 두 발바닥이 차지하는 넓이가 되고 말았다.” 막다른 곳에 몰린 명준은 바다를 보며 ‘푸른 광장’의 환각에 유혹을 느낀다. 그 세계는 현실과 달리 안정감을 주는 푸근한 세계로 비친다. 인간이 누구나 바다를 보면 뛰어들고 싶은 깊숙한 욕구를 느끼게 되는 것과 같다. 명준의 자살은 태초의 바다로의 본능적인 회귀에 가깝다.
“물결과 마음의 사이는, 차츰 가까워진다. 끝내 그의 몸과 물결은 하나가 된다. 그의 몸은 꿈틀거리는 물이랑을 따라, 곤두박질한다. 꼬이고 풀리는 물결 속에 그의 몸뚱어리가 풀려나간다. 그의 몸은 친친 막아놓은 밧줄처럼, 배에 얹힌 대로지만, 스크루의 물거품처럼, 술술 풀려나가서는, 말간 바닷물이 된다. 몸의 세포가 낱낱이 흩어져, 세포 알알이 물방울과 어울려 튄다....그 속에 파묻힌다. 자꾸 몸이 풀린다... 물결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없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결정적인 자살원인은 (3)이다. (3)이 아니었다면 이명준은 아마 살아남아 중립국으로 갔을지 모른다. "은혜의 죽음을 당했을 때, 이명준 배에서는 마지막 돛대가 부러진 셈이다... 대일 언덕 없는 난파꾼은 항구를 잊어버리기로 하고 물결 따라 나선다." 둘의 사랑은 아름답고 원시적일만큼 순수했다. 명준은 은혜에게 먼 옛날에 잃어버렸던 자기의 반쪽같은 느낌을 가진다. 그녀를 죽도록 사랑했던 그는 은혜마저 뱃속에 아기를 품은 채 전사하자, 한 뼘의 광장마저 완전히 무너짐을 느꼈다. 명준은 유일하게 기댈 곳을 잃었기에 자살하게 되었다.
소설 전반에는 바다와 갈매기의 이미지가 반복해 나온다. 이 둘은 순수와 사랑의 상징과도 같다. “우리 애를 쏘지 마세요.”라는 어미 갈매기의 환청을 듣고, 이명준은 타고르호에서 자신을 따라오던 환각의 정체가 갈매기 두 마리, 바로 은혜와 자신의 딸임을 깨닫는다.
“그는 두 마리 새들을 방금까지 알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무덤 속에서 몸을 푼 한 여자의 용기를, 방금 태어난 아기를 한 팔로 보듬고 다른 팔로 무덤을 깨뜨리고 하늘 높이 치솟는 여자를, 그리고 마침내 그를 찾아내고야 만 그들의 사랑을.”
이명준의 자살은 결국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사랑으로 해석된다. 역사와 사회 체제 속에서 길을 잃은 그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건 사랑 뿐이었다. 환각과 바다로의 회귀, 사랑과의 영원한 합일이 엉킨 자살이라는 점에서 일면 숭고하고 아름답게까지 느껴진다. 그의 자살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가 최후의 안식처로 선택한 바다는 이념이 없고, 사랑만이 참다운 가치를 실현시킬 수 있는 푸른 광장이다. 이명준의 바다는 그의 완벽한 광장이자, 동시에 밀실인 것이다. 바다, 물은 생명이라는 원형적 이미지와 새로운 탄생을 떠올리게 한다. 이명준은 자살했지만, 비극적이라는 느낌이 덜하다. 진정한 사랑으로의 구원을 추구한 이명준의 자살은 소설에서 필연적이며, 그러나 현실세계에선 이념을 벗어나서 살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푸른 바다로 섞여 들어간 이명준은 그 세계에서는 은혜와 딸과 함께 행복했을 거라 믿고 싶다. 그리고 남은 우리에게는 여전히 지속되는 분단과 이념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하는 과제가 주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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