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과생의 평론
1) 탈주(脫走)의 욕망, 답답한 도시 속에서의 몸부림
인구 수십만이 모여 살고 있는 거대도시, 끝없이 솟아오르는 높은 빌딩, 똑같이 생긴 공간 속에서 똑같이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 작가 한강은 이 답답하고 메마른 사회에서 어떻게 인간이 생명력을 지닌 존재로서 온전히 살아갈 수 있겠느냐는 의문을 제시한다.
결혼 전에는 웃음이 많고, 함께 거리를 걷기가 부끄러울 만큼 어려 보이던, '언제나 목소리에 웃음의 기운이 밝은 배경처럼 깔려 있던' 아내는 결혼한 지 4년 만에 앙상하게 시들어 피로감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다. 아내는 근본적으로, 그리고 체질적으로 한 곳에 정착해서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이다. 한때 그녀는 어디론가 훌쩍 떠나 혈관 구석구석에 낭종(囊腫)처럼 뭉쳐 있는 나쁜 피를 갈아내고, 자유로운 공기로 낡은 폐를 씻고 싶다는 오랜 꿈을 갖고 있었다. 어머니처럼 바닷가 빈촌에 정착해 살기 싫어서 고향을 떠나왔던 아내의 꿈은 그러나 결혼과 함께 상계동 아파트 13층에 갇혀 침잠해버린다.
인구 칠십만이 모여 산다는 거기서 천천히 말라죽을 것 같아. 수백 수천 동 똑같은 건물에, 칸칸마다 똑같은 주방에, 똑같은 천장에, 똑같은 변기, 욕조, 베란다, 엘리베이터도 싫어. 공원도, 놀이터도, 상가도, 횡단보도도 다 싫어…….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갈 것 같단 말이야. 그 십삼 층에서 내려오지 못할 것 같단 말이야.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단 말이야.
그녀는 현대사회의 차가운 금속성과 무생명성에 면역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아파트에서 연약한 식물처럼 말라죽어가는 그녀는 현대 문명의 획일화와 자유억압의 희생양이다. 남편이 평범하게 이 도시를 살아가는 현대인이라면, 아내는 현대문명을 유난히 못 견디는 일종의 '사회 부적응자'이다. 철제 현관문과 베란다 쇠창살은 보이지 않는 감옥처럼 그녀를 옥죈다. 그 감옥 속에서 그녀는 하염없이 창문 밖을 내다보며 새장 안의 새처럼 자유를 갈망한다. 어깨를 시든 배춧잎처럼 늘어뜨리고 바깥을 내다보고, 자다가도 도로가 달리는 것 같다며 깜짝깜짝 놀라며 깨는 그녀는, 불안감을 느끼는 동시에 어디론가 자신도 훌쩍 떠나버리고 싶은 소망을 아직도 잊지 못하는 것이다. 다들 어디로 저렇게 달려가느냐고 물으면서 말이다.
나는 언제나 달아나고만 싶었어요. 울부짖고 싶었어요. 세상에서 가장 착한 얼굴을 하고 버스 뒷좌석에 웅크리고 앉아, 어머니, 주먹으로 유리창을 박살내고 싶었어요. 내 손등에 흐르는 피를 게걸스럽게 핥아먹고 싶었어요. 무엇이 나를 그토록 괴롭혀서, 무엇으로부터 달아나겠다고 나는 지구 반대편까지 가려고 했을까요. 왜 가지 못했을까요, 병신처럼. 왜 훌훌 떠나 이 지긋지긋한 피를 갈지 못했을까요.
아내는 자신이 가지 못한 길에 대한 끝없는 회한과 번민으로 괴로워한다. 심적 고통이 참을 수 없는 한계에 도달했을 때 돌연 푸른 멍이 몸을 뒤덮기 시작한다. 처음에 손바닥만 한 연푸른색에서 시작한 멍은 곧 큼직한 토란잎만한, 둔탁한 녹색으로 변하고 급기야 거의 살갗 전체에 푸른 피멍이 앉아 흰 부분이 반점처럼 보일 지경까지 이른다. 병원에서도 원인을 알 수 없고 피멍이 든 부분에 통증도 없으며, 점점 짙어지고 온몸으로 퍼져간다는 것은 이 멍이 단순한 외상이 아닌 마음에서부터 기인한 내상임을 암시한다. 몸에 멍이 퍼져나가는 것과 함께 풋사과 같던 아내의 뺨은 깊이 패이고 안쓰러울 만큼 깡말라간다. 얼굴빛도 납물이 든 것처럼 푸르스름하게 질리고 윤기 있던 머리카락도 마른 시래기처럼 푸석푸석해지며 잔병이 조금씩 늘어난다. 점점 음식도 잘 소화하지 못하고 토악질을 해대며 도시에서의 삶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비워내려고 하는 것이다. 도시를 뛰쳐나가 마음껏 달리는 꿈을 이루지 못한 그녀는 결국 움직이는 인간으로서의 상징인 다리를 소멸하고 만다.
2) 소통의 부재
소설은 두 개의 시점으로 나뉘어 진행된다. 전반부는 남편이 화자로 등장해 아내를 관찰하는 안타까운 감정을 털어놓는다. 후반부는 식물이 된 후에 아내가 직접 어머니에게 전하는-그러나 전해지지 못하는- 독백형식으로 이루어진다. 독자가 자신의 속마음을 끝내 남편에게 말하지 못하고 식물이 되어버린 아내를 이해하기 위해선 시점의 전환은 적절한 장치로 보인다. 아내는 자신을 친절하게 돌보아주는 남편을 계속 느끼지만, 생명이 끊기기 전 편지를 쓰듯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은 대상은 남편이 아닌 결국 자신의 근원인 어머니였다. 마지막 장면에선 시점이 다시 남편으로 돌아와 아내의 마지막을 지켜본다.
아내의 문제는 무엇일까. 어떤 괴로움이 심인성(心因性)의 장애까지 불러일으킨 것인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작품은 결혼한 지 4년 된 신혼부부의 이야기로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고 무덤덤하게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기만 하며 살아가는 부부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아내의 이야기를 이해했다기보다는 단지 그 어디쯤에서 정적을 깨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에 남편은 아내에게 시선을 돌리고, 아내의 알몸을 본 것도 지난해였던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는 일에도 차츰 열중하지 않게 되었으며, 남편은 아내의 알몸을 보고도 욕망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단조롭고 건조한 관계로 변해버린 부부의 모습이 그려진다.
아내가 정착하지 않고 세상 끝까지 가는 꿈을 이야기할 때 남편은 한 곳에 뿌리를 내리는 화초이야기를 한다. 자신의 꿈은 아파트 베란다에서 파랑 상추랑 들깨를 심는 거라고. 그녀에게 산 사람의 삶 같지 않던 3년은 남편에게는 모든 면에 있어서 가장 따뜻하고 평화로운 시간이었다고 느껴진다. 아내가 베란다에서 인간으로서의 삶을 괴롭게 소멸시키며 먼 곳으로 달아나는 꿈을 꿀 때 남편은 출장을 갔다가 먼 곳에서 돌아온다. 이렇게 아내와 남편은 서로 소통하지 못하는, 서로 너무도 다른 꿈을 생각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내와 말다툼을 하다가 본인의 '짧고 아슬아슬한 행복을 함부로 깨뜨리는 아내의 예민함을, 자신이 말한 대로 낡은 우울질(憂鬱質)의 피가 흐르는 그녀의 깡마른 몸뚱이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진' 남편은 두 손에 받은 빗물을 홧김에 아내의 얼굴에 끼얹어 버린다. 그 후 아내는 입을 다문 뒤 다시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그날 이후 다시는 두 부부가 싸우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부부는 서로에게 타자가 되고 관계와 소통이 단절된다.
작가는 남편과 아내 둘 다 연민의 시선으로 그려낸다. 남편은 쉽사리 꿈을 포기한 아내를 보고 별 것 아니었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그 꿈은 아내의 생명이자 운명이었다. 그것을 이해받지 못했으니 아내는 외로움과 단절감, 고립 속에서 더욱더 말라간 것이다. 남편 또한 아내를 이해할 수 없어서 외로웠다. 남편은 아내의 ‘옆얼굴’에서 외로움을 읽었기에 자신의 외로움을 이해해주리라 기대했었다. 그러나 ‘나는 평생을 외롭게 살았습니다.’라고 절절히 고백했을 때에 아내는 차가운 옆얼굴만을 보여주었다. 끝내 남편은 아내의 정면을 볼 수 없었다. 그녀가 식물로 변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후에 남편은 ‘그 죽은 화초와 채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젊었던 날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하고 순수한 사랑이 있던 지난 젊은 날들을 그리워한다. 작가는 자꾸만 인물의 지나온 과거, 이루지 못했던 꿈과 사라져간 것들을 반추하며 회한의 어조를 반복한다. 몸에 피멍이 든 아내를 보고 남편은 그녀의 모습이 그지없이 한심하고 가엾고 서글프다고 느낀다. 자신들도 느끼지 못한 새 식어간 사랑에 남편 역시 안타까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내가 식물로 변한 후 정성스럽게 그녀를 관리해주고 눈물 섞인 약수를 부어주는 모습은 고독하고 처연하게, 그리고 쓸쓸하게 다가온다.
3) 탈신
아내의 탈주에 대한 갈망과 소통의 부재로 인한 고통은 푸른 멍으로 형상화되어 아내의 몸을 잠식해 그녀를 식물화시킨다. 식물화가 진행되기 전에도 아내의 식물성에 대한 복선은 내내 깔려있다. 그 예로 남편의 소망이었던 화초에 대한 아내의 정성은 유난했다. 아파트에 갇혀 사는 화초와 자신을 동일시한 심리였을 것이다. 남편이 기억하는 마지막 잠자리에서도 아내의 아랫도리에서는 체액의 시큼한 냄새 대신 낯설고 싱그러운 풀냄새가 났었다. 남편이 아내에게 동물적인 성적욕망을 느끼지 못해서 부부관계를 맺지 않는 것은, 아내에게 이러한 식물성만을 느끼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내는 몸에 멍이 생긴 이후로 자꾸만 밖으로 나가고 싶고 햇빛만 보면 옷을 벗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발가벗고 베란다로 나가 빨래건조대 옆에 마치 미친 여자처럼 서있기도 하면서 따뜻한 햇살을, 자연을 몸에 받아들이고 싶어 하는 것이다. 식물이 햇빛을 향해 몸을 구부리는 '향일성'으로 볼 수 있다.
위, 간, 자궁 등 장기들은 그녀의 몸속에서 서서히 사라지고, 마침내 남편이 출장을 갔다 온 사이 그녀는 거의 식물의 형상을 하고 있다. 허벅지에서 잔뿌리가 돋아나고, 가슴에서는 검붉은 꽃이 피었다. 즉 짐승의 세상에서 동물의 몸을 벗고 식물로 '탈신'한 것이다. 베란다에 못박인 채 식물로 변해버린 그녀의 모습은 언뜻 인간이 망부석이 되어버린 설화를 연상시킨다. 그렇지만 그녀는 돌로 변해 죽어버린 것은 아니다. 고통을 통해 동물의 몸을 벗은 아내는 오히려 인간이었을 때보다 능동적인 생명성을 지닌다.
아내는 베란다의 쇠창살을 향하여 무릎을 꿇은 채 두 팔을 만세 부르듯 치켜올리고 있었다. 그녀의 몸은 진초록색이었다. 푸르스름하던 얼굴은 상록활엽수의 잎처럼 반들반들했다. 시래기 같던 머리카락에는 싱그러운 들풀 줄기의 윤기가 흘렀다.
남편이 아내의 가슴에 물을 끼얹어주자 '아내의 번득이는 초록빛 몸이 물세례 속에서 청신하게 피어나'고, 그 모습을 보고 그는 '내 아내가 저만큼 아름다웠던 적은 없었다'고 느낀다.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섬뜩하고 괴기스럽기까지 하지만, 식물이라는 다른 존재로 변화하고 초월함으로써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약동하는 생명력에 몸을 떠는 아내의 모습은 아름답다.
그녀는 식물이 되는 과정 속에서 모든 것들을 더욱 생생하게 느끼고, 더욱 행복함을 이야기한다. 곧 인간으로서 자신이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지만 오래 전부터 이렇게 바람과 햇빛, 그리고 물만으로 살기를 바라왔다며 만족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식물로 변한 후 어머니에게 이야기하는 독백을 통해 독자는 그녀가 메마른 도시에 갇혀 표출되지 못했던 꿈과 소망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그녀가 어린 시절 무슨 꿈을 꾸었는지, 얼마나 많은 말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는지를 느낄 수 있다.
그녀는 밤마다 꿈을 꾼다. 키가 쑥쑥 자라 하늘로 뻗어 올라가서 이 집을 떠나는 꿈을. 식물로 변하는 것, 탈신은 그녀의 새로운 탈주의 방식인 것이다. 식물이 되어 그녀를 억압하는 갑갑한 철근을 뚫고 생장점 끝에 꽃을 틔워 무엇보다도 강한 힘으로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생명이 되고자 한다. 꽃은 그녀에게 매우 강렬한 생명의 이미지로 다가오는데, 스스로 꿈꾸고 스스로 움직이며 스스로 살아나는 꽃은 자유를 향해 비상하고 싶어 하는 그녀의 마음을 대변하는 존재이다.
마음에서 연유한 상처는 현실적으로는 치유될 수 없기에 식물로의 변신은 그것이 실제적이건 은유적이건 간에 상처 치유의 한 방법임을 의미한다. 변신 이후 남편의 고백(“내 아내가 저만큼 아름다웠던 적은 없었다.”)이나 아내의 고백(“그이는 무척 친절해졌답니다.”)은 이들 부부가 변신을 통해서야 비로소 서로의 존재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되었음을 입증한다. 즉, 현실을 초월함으로써 내면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이조차 온전한 초월이 되지는 못하고 쇠창살로 둘러쳐진 비좁은 아파트 베란다의 화분 속 식물로 탈신하는 것에 그치는 한계를 지닌다.
도시 속에서는 식물로도 오래 살아남지 못한다. 맑은 주황빛에서 다갈색으로, 잎도 점점 떨어뜨리며 생명의 흔적으로서 조금씩 내뿜던 미미한 전류도 차츰 줄어들기 시작하고 뿌리를 뻗칠 공간이 없는 화분 속에서 죽음을 예감한 그녀는 자신을 다정하게 가꾸어주면서도 화를 내고 울기도 하는 남편을 아련하게 바라볼 뿐이다. 그녀가 가을 무렵 아파트 베란다에서 완전히 식물이 되었을 때 죽음도 함께 찾아온다. 하지만 베란다에서 시들어버린 아내는 「내 여자의 열매」라는 소설의 제목이 함의하고 있듯이 한 움큼의 열매를 남기고 완전히 죽고 만다.
입이 오그라붙었던 자리가 벌어지면서 한움큼의 자잘한 열매들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그중 하나를 집어 입안에 머금어보았다. 매끈한 껍질에서는 아무런 맛도 냄새도 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힘주어 깨물었다. 내가 지상에서 가졌던 단 한 여자의 열매를. 그것의 첫맛은 쏘는 듯 시었으며, 혀뿌리에 남은 즙의 뒷맛은 다소 씁쓸했다.
아내가 ‘낳은’ 열매는 고승의 몸에서 나오는 사리를 연상시킨다. 아내가 품어왔던 마음이자, 정신적 분신이고, 응축된 삶이며, 소설의 모든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 현대사회의 파괴성에 대항한 식물성의 가치는 열매라는 결과물로 남아 다음 생을 이어갈 것이다. 여성의 생명력, 재생력이 소설의 주요 키워드라는 관점에서 이 작품에는 '에코페미니즘(Eco-Feminism)'의 주제의식이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에코페미니즘은 생태(혹은 환경)를 의미하는 에코(eco)와 페미니즘(feminism)을 결합시킨 복합개념이다. 이는 상황의 동치성, 즉 자연과 여성에 가해지는 억압 구조 사이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그녀가 왜 하필이면 겨울이 오면 죽게 되는 일년 살이 식물로 변신했는지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한강은 여성의 '식물 되기'가 죽음이라는 과정을 긍정하는 하나의 방식임을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만물이 순환하며 끊임없이 관계를 맺는다는 생태적 인식은 죽음과 소멸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 바로 생태주의의 궁극이다. 자연과 여성에 가해지는 억압 구조 사이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인식은 이렇게 한강의 작품 세계에서 중요한 모티브를 형성한다.
4) 미학적 묘사
한강의 소설 속에서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다양한 식물들과의 비유를 통해서 여성의 외양을 묘사하고 있는 점이다. 한국 작가들 중에서 이렇게 지속적으로 식물과 여성을 동시에 이어놓는 경우는 흔치 않다. 본문에서 '연한 고구마 순처럼 낭창낭창하던 허리', '제범 윤기가 있었던 머리카락은 마른 시래기처럼 푸석푸석했다.', '좁은 어깨를 시든 배춧잎처럼 늘어뜨린 채', '잘 익은 포도알 같은 아내의 눈'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의 또다른 단편 <몽고반점>에서도 한강 특유의 원초적 식물성과 예술적 미감이 여실히 드러난다. 형부가 처제의 몸과 자신의 몸에 붓으로 식물과 꽃을 그려 전위예술을 행하다가 완전한 식물성의 합일을 위하여 관계를 갖는다는 내용이다. 거부감이 드는 내용이나, 화가의 붓처럼 예술적인 감각의 터치로 그려내어 수작으로 평가받는 소설이다. <내 여자의 열매>와 주제의식과 쓸쓸한 생명성의 미감이 흡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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