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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망 Jul 27. 2023

외면하고 싶은 이생물 : 다섯째 아이 - 도리스 레싱

국문과생의 평론


1. 외면하고 싶은 이생물이 태어난다면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 만만치 않은 소설이라는 평 때문에 각오를 하고 읽었음에도 ‘벤’은 정말 공포스러웠다. 3인칭으로 쓰였는데 몰입감이 대단해서 내가 해리엇 가족의 일원이 된 것 같았다. 나는 세 번째나 네 번째 아이이고 싶지만 '벤' 자체일 수도 있다.  



  줄거리는 이렇다. 1960년대 런던, 남녀 데이비드와 해리엇이 만나 모범적이고 행복한 가정을 꾸린다. 네 명의 아이를 키우던 중, 다섯째 아이 '벤'이 태어나는데 그야말로 괴물같은 존재다. 아기 때부터 이상한 유전자가 발현되어 모든 걸 파괴해버린다. 아주 현실적이면서 끔찍한 가정을 소설로 풀어냈다. 해리엇은 행복을 바랐던 자신에 대한 신의 형벌일까, 랜덤같은 진화의 산물 혹은 어떤 예언일까 질문하며 괴로워한다. 



  도리스 레싱은 행복한 동시에 어딘지 괴이한 중산층의 분위기를 잘 그린다. 그들은 내내 문제의 핵심을 말하지 않고 회피한다. 교장선생님도, 친척들도, 가족들도 “벤은 가정을 파탄내는 나쁜 놈이고 악마야.”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점잖은 이들에게 왜 이런 불행이 왔을까? 견디기 힘든 침묵은 계속되고, 누구도 직접 막말하거나 욕하지 않는다. 절이 싫은 중처럼 본인이 떠나버린다. 그 시대 영국 사회의 분위기가 그랬던 걸까? 진실을 내뱉으면 정말로 불행이 현실이 될 까봐 못 받아들였던 걸까? 그저 이게 꿈이라고 믿고 싶은건지도. 수년 간. 



  주인공 해리엇은 벤을 임신하고부터 느낀다. 태어나지도 않은 태아에게 이미 원한이 있다는 것을. 모체는 아기를 어디까지 감각할 수 있는 건지 나는 임신 경험이 없는데도 이 소설을 통해 알 것만 같다. 아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다가도, (물론 마음을 입 밖에 내지 않는다.) 본능적인 모성애가 발동해서 끝내 벤을 보호한다. 그녀는 복잡한 감정으로 인해 시달린다. 벤을 죽게 내버려두지 않았다는 자긍심과 벤을 낳은 근원적인 죄책감이 더해져 해리엇은 점점 쪼그라든다. 시댁과 친정, 지인들에게까지 죄인이 된 심정이다. 



  도리스 레싱이 소설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건 이것 같다. 가족 공동체의 행복이 얼마나 깨지기 쉬운가. 가정은 가장 끈끈한 관계임에도, 작은 요소로 인해 붕괴되기 쉽다. 한 순간을 기점으로 돌이킬 수 없어진다. 가족 구성원들은 나름의 노력을 다해 보지만 삶의 무작위성 앞에 무력해진다. 하물며 벤도... 원래 그렇게 태어난 것을 어쩌겠는가. 단지 숙명적인 비극, 재난인 것이다. 



(*스포 주의*)



  소설은 다섯째 아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고통받다가 끝난다. 결말 부분에 해리엇이 큰 식탁에 홀로 앉아 생각하는 장면은 작품의 백미다. 긴 세월을 견뎌온 식탁과 함께 자신이 견뎌온 시간을 생각한다. 그녀는 벤을 ‘다른 생물체’로 규정하고 거리를 둔 채, 그 애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는 어떻게 살아갈지를 본인에게 계속 묻는다. 행복했던 시절을 저 너머로 잊어버린 채 무기력해진 사람, 운명의 폭력 앞에서 겸허해진 사람이 되었다. 



2. 사회생물학 관점에서 본다면


  작가 설명을 더 읽어보자. 도리스 레싱은 정신분석학과 사회생물학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런 소설이 나왔구나 싶다. 마침 나도 읽으면서 대학 때 잠깐 배웠던 사회생물학을 떠올렸다.

 사회생물학은 ‘사회적 행동을 생물학적으로 다루는’ 학문이다. 사회생물학자들은 인간도 유전적으로 분석한다. 인종적 불평등 이데올로기를 유전학적으로 정당화시킨다는 점에서 비판받아오기도 했지만, 점점 보완되고 있다. 



  벤은 아주 복잡하면서도 단순한 생물체다. 흔히들 아는 싸이코패스보다는 마치 이(異)생물의 후손같다. 다윈이 ‘보편적 합목적성(모든 존재, 진화가 특정한 차원 높은 목적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목적론적 입장)’을 거부한 것처럼, 벤 또한 어떤 목적성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 부모의 유전자 중에서 잘못된 방식으로 ‘선택’되었거나, 일종의 ‘돌연변이’일 가능성이 크다. 외계에서 왔을 수도 있다. 소설은 어떤 방향으로든 열려있다. 현실은 판타지이고, 판타지는 현실이 된다. 판타지 소설은 아니니까 독자들의 상상 속 벤이 어떻게 생겼을지도 궁금해진다.


  사회생물학에선 인간과 유인원들이 ‘공동 조상’을 가졌을 것이라 본다. 벤은 본능적이고 야생동물과 같은 속성을 지녔다. 거기엔 후천적인 사회, 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는 끈질김이 있다. 어머니가 십 몇년 동안 관심을 주며 키워도 소용이 없다. 



“그녀는 그를 통하여 인간성이 무대를 차지하기 수천만 년 전에 정점에 도달했던 종족을 바라보고 있다고 느꼈다. 벤의 종족은 위쪽 땅 위에서는 빙하시대가 진행되는 동안 땅속 동굴속에 살면서..(중략).. 그리하여 새로운 종족을 만들었고 그 종족은 번성하다가 사라졌는데 어쩌다 그들의 씨가 여기 저기 인간의 모체에 남겨졌다가 벤처럼 다시 나타나는 것일까?”



  마지막으로, 사회생물학적인 논쟁거리도 던져볼 만 하다. 유전자공학이 발달해서 인간이 태어나기 전 범죄자 혹은 싸이코패스가 될 것이 확실한 유전자를 미리 알아낼 수 있다고 치자. 우리는 또 다른 벤이 될 유전자를 채취했다. 이를 미리 알았을 때 그 애가 태어나기 전에 죽이거나 태어난 후 격리시켜야 할까? 아니면 인권을 고려해서 그대로 낳아 길러야할까? 쉽게 답할 수는 없는 문제다.       

 



#평론 #소설 #책 #독서 #독후감 #도리스레싱 #다섯째아이 #사회생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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