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are my nightmare
눈 뜨자마자 보이는 깨끗한 얼굴의 하늘. 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눈을 꿈벅댄다. 아, 여기 말레이시아지. 서울의 내 방이 아닌 풍경에 나는 그 어느때보다도 빨리 깨닫는다. 꿈이었다. 오늘은 꿈 속의 언젠가와 다른 날, 여기는 꿈 속의 어딘가와는 다른 장소다. 어제는 비가 쏟아지더니 오늘은 저렇게 말갛다. 아마 저 날씨가 오후까지 간다면 오늘 석양도 정말 끝내줄 것 같다. 생각해보니 꿈은 끔찍했어도 잠은 깨지 않고 잤다. 서울에선 이런 꿈을 꾸면 꼭 새벽 세시나 네시에 눈을 떴다. 다시 잠들 수 없는 밤만 남은 새벽은 무척 우울한 것. 자리덧 심한 내가 이곳에 이사 온 뒤로 아직 잠을 설친적이 없다는게 신기하기만 하다. 공기가 좋아서 그런가…. 미적미적 일어나 거실로 나오니 창 밖으로 뽀얀 안개가 우거진 나무들을 감싸안고 있다. 소파에 앉아 새 아침의 촉촉함을 구경하며 조용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는다.
다 끝난 일이니 상관은 없다. 그러나 오늘처럼 꿈이라는 것도 깨닫지 못한채 보고싶지 않은 얼굴을 보고, 다시 내가 그의 아내가 되고 그가 내 남편인 상황에 푹 빠져있다 나오면 깬 뒤에도 마음이 얼얼하다. 악몽은 짙고 강렬해서, 그것이 흐려지며 살아온 내 여리고 옅은 일상을 금세 위협한다. 밑도 끝도 없는 분노와 원망, 집안을 엉망으로 만드는 크고 육중한 몸, 목에 핏대를 세우며 침을 튀기고 위협하는 얼굴 같은 것. 그런 것에 놀란 마음이 아직 남아있어 이런 꿈을 꾼 날은 한동안 멍하니 앉아 지난 2년의 시간을 더듬어 업데이트한다. 시간이 꽤 지났고, 그 사이 많은 일이 있었고, 그 중에 좋은 일도 참 많았고, 나는 그때와는 또 다른 사람이 되었노라고, 하나하나 천천히 되짚어 상기한다. 나는 한 번의 꿈으로 한참을 뒤돌아가버린 내 삶을 붙잡아 짊어지고, 앞으로, 앞으로 걸어 나온다. 시간은 꼭 앞으로만, 앞으로만 흘러가야 한다.
그러고 보니 이맘때다. 달력을 보니 꼭 2년이 지났다. 2년 전 이맘 때 판사 앞에 가 아주 간단한 질문과 절차로 이혼을 확인 받았다. 그걸 까맣게 잊고 12월을 보내는 중에 몸은 기억을 하고 있었나보다. 아직 기억하고 있다고 말 하고 싶었나보다. 그래, 네가 아직 전부 기억하고 있나보다. 많이 놀랐었지? 맞지, 그럴 만도 하지, 그런 등신은 처음이었으니까…. 나는 자연스레 맨 처음 이혼합의서를 내러 법원에 갔던 날을 떠올린다. 그땐 아빠가 있었다. 행여 사위란 놈이 딸을 어쩔까 싶어 나를 따라나섰던 아빠가 내 어깨를 끌어안고 "괜-찮아!"라고 했다. '괜'을 늘려 말하던, '아' 부분은 한없이 경쾌하던 그 목소리며 말투가 아직도 귀에 선하다. 아빠는 그때 자신도 괜찮지 않았을 거면서 나에겐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그 말이 맞았다. 아빠가 맞았다. 괜찮은 것이었다.
아빠는 그 말을 남기고는 내가 두번째 기일을 기다리는 사이에 세상을 떠났다. 2년 전, 그 두 번째 기일에 내가 엉엉 울었던 건 이혼이 슬퍼서가 아니었다. 아무도 아빠를 데리고 오지 않는 곳이었음에도 아빠를 데리고 오지 못한 것이 슬퍼서였다. "괜-찮아!"라고, 아직까지도 잊히지 않는 그 말을 해줬던 아빠가 보고싶어서였다. 그 사이 나는 이전과는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이 되었는데, 아빠는 이런 나를 알고 있을까? 어쨌든 시간은 앞으로만 흐르니 나는 점점 더 괜찮아지는 수 밖에 없다. 아빠 말대로.
그때는 아빠가 있었는데….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간에 아빠가 같이 있어줬다는 게 위안이 될 줄은 몰랐다. 기억이란 지나고 나면 미화되기도 하는 것. 그 때 아빠가 곁에 있었다는 것 하나가 다른 기억들을 좀 더 괜찮은 것으로 만들어줄 지도 모를 일이다. 춥지 않은 12월, 조금 이따 열 시만 되어도 30도까지 훌쩍 올라갈 겨울이다. 어제부터 널어놓은 빨래가 아침 햇빛에 얼굴을 부비고 있다. 저기 걸린 저 남색 잠옷이 오늘 밤 나를 햇빛 냄새나는 꿈 속으로 데려가 줄 것이다. 그러니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