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

Where a crazy clock takes me

by 이슬

깊은 밤, 내 방의 무소음 벽시계가 엄청난 소음을 내기 시작했다. 나는 무의식 상태에 들어가 누워있다가 아주 규칙적으로 소란스러운 시계 소리에 아른아른 의식이 돌아왔다. 잠에서 살짝 깨어나니 꿈꾸기 좋은 상태가 되었던 것 같은데, 그때 아빠를 만났다.


꿈에서 나는 신한 학원 근처를 걷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 아빠가 강사로 있었던 반포의 학원가. 아빠가 돌아가신 후 실제로 그 근처에 갔다가 이제 학원은 없어진 휑한 건물을 빙 둘러 돈 적이 있는데, 꿈에서도 그 동선 그대로였다. 나는 익숙한 걸음으로 유리 정문을 열고 들어가, 계단과 엘리베이터를 지나서 뒤쪽 주차장으로 향했다. 쪽문으로 나와 주차장을 휘 둘러보았다. 어디선가 아무렇지도 않게 아빠가 나타나 7348 프린스에 시동을 걸고 나에게 손짓을 할 것 같았다. 나는 슬퍼하면서 잠에서 깨었는데, 꿈에서 깨어도 꿈이었다.


나는 꿈속의 꿈에서 깨어나 아빠를 보고 싶어 하며 안방으로 갔다. 그리고 거기에 아빠가 있었다. 아빠는 그 와중에도 팬티만 입고 있었다. 이래서 평소에 어떻게 하고 살았는지가 중요한가 보다. 팬티는 입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무튼 아빠는 늘 그랬듯 사각팬티 차림으로 배를 두드리며 침대에 누워있었고, 나는 얼른 아빠를 끌어안고 울었다. 아빠의 퉁퉁한 오른쪽 어깨에 내 눈물이 묻었다. 아빠는 나에게 "너무 갑자기 간 것 같아서 미안해서 왔다"고 했다. 그런데 왜 팬티만 입고 온 거야 아빠...? 그렇게 물을 겨를도 없이, 나는 일단 아빠가 왔으니 어서 그동안 하지 못한 사과와 눈물을 쏟아내기 바빴다. "가혹한 일인 것 같아도, 지나고 나면 다 괜찮을 일이야." 그리고서 아빠는 "어려서는 피자 같은 게 좋아도 나중에 크고 나면 딱히 안 좋다는 걸 알게 되듯이...." 어쩌고저쩌고 말을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무슨 말이지 싶은데 꿈속에서는 다 이해가 됐다. 아무래도 죽음이라는 것도 지나고 나면 좋은 일일 수 있다는 걸 말하는 것 같았다.


그때 엄마가 나를 불렀다. 엄마는 아빠를 보지 못했다. 나는 거실에 앉아 있는 엄마에게 아빠가 너무 보고 싶은 꿈을 꿨는데, 나와보면 있을 것 같아서 나와보니 아빠가 있었다고 얘기를 했다. 엄마는 새벽기도를 하려고 일어났다고 했다. 새벽 5시였다. 시간을 확인하자마자 꿈속의 꿈, 그리고 꿈에서 깼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벽시계가 정신이 나간 듯 맹렬하게 소음을 내고 있었다. 새벽 5시였다. 나는 방금 내가 꿈속에서 보고 겪은 모든 게 잊혀질까 두려워하며 얼른 핸드폰을 들어 메모장을 열었다. 그리고 수많은 오타를 내며 받아적고, 다 적고 나서야 눈물을 쏟았다. 울음이 났다.


아빠는 더는 이 세상에 살지 않기 때문에, 아빠와 나의 관계는 우리가 마지막으로 봤던 그때에 머물러있다. 2년이 지났지만 늘 거기에 있다. 나는 아빠가 어디에 있는지를 2년째 궁금해하고, 꿈에서 아빠를 보면 꼭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운다. 아빠는 나를 안아주거나, 위로해주거나, 이 세상에 살았던 때처럼 굴지만 꿈이 깨면 그뿐이다. 우리는 언제쯤 이 관계를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아빠. 그때는 미안했어, 내가 잘못했어, 보고 싶었어. 언제쯤 이런 장면이 우리에게 지나간 것이 될 수 있을까. 아마 나는 앞으로 50년은 더 아빠와 멈추어진 관계를 유지할 것이다. 길지 않은 시간이다. 지나온 30년처럼, 금방 지나갈 것이다. 아빠가 있었던 28년의 시간을 곱씹어가면서 추억하다 보면 아주 금방, 지나갈 것이다.


삶이라는 것에 그렇게 큰 미련이 없다. 아빠가 죽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세상은 오래 살기엔 너무 아름답고, 너무 슬픈 곳이다. 나는 되고 싶은 것도 없고 갖고 싶은 것도 없다. 가끔씩 갖고 싶은 게 생기더라도 시시한 쓰레기들, 눈물이 날 만큼 별것 아닌 것들뿐이다. 하고 싶은 것도 없다. 어두운 밤, 불을 끄고 누워 나 자신에게 뭘 하고 싶으냐 물어보면 그저 어느 어두운 바닷가에 하염없이 앉아있는 나를 상상했다. 그래, 가고 싶은 곳은 있다. 남극에 가고 싶다. 어두운 밤 숨 막히는 오로라가 나타나는 북극에 가고 싶다. 달의 뒷면 어딘가에 가고 싶다. 가만히 생각해 보기만 해도 눈물이 날 것 같은 그런 곳에 가고 싶다. 나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그곳들에서 벌써 뭘 봐 버린 걸까. 사실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뭘 보고 싶은 걸까. 하염없는 것들. 그 자체로 아주 오래된 것들. 멀리에서 오는 것들. 감당할 수 없는 고요함과 고독으로 가득 찬 것들. 그리고 앞으로도 아주 오래 있을 것들. 영원히, 영원히 어딘가를 향하는 것들. 아빠가 죽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을 떠나려 인천공항으로 향하던 공항버스는 세 명의 승객을 태우고 달렸다. 버스 맨 앞에 달린 TV만 소리 없이 시끄러웠다. 미국 대통령 트럼프가 북한에 경고를 보냈다고 했다. 곧이어 트럼프가 '로켓맨'이라 부르는 이가 뚠뚠한 몸으로 박수 치는 모습이 뉴스에 나왔다. 뒤이어 법무부 장관 후보가 뽀얗고 청렴해 보이는 얼굴로 인터뷰를 했고, 뭔 놈의 법무부 장관이 저렇게 자주 바뀌나, 눈을 돌려 창밖을 쳐다봤다. 미세먼지가 잠깐 풀린 한파를 뚫고 기승을 부리고 있었고, 창가에 앉은 내 왼쪽 귓가로 뒷사람의 입 냄새가 불어왔다. 어쨌든 나는 떠나고 있었다. 오늘 새벽의 미친 시계가 과거도 미래도 아닌 어딘가에 나를 데려다 놓았듯이, 내가 탈 이스타항공의 비행기도 날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낯선 곳에 내려줄 것이었다. 꿈이 아니니 거기에 아빠는 없을 것이다. 무덤덤한 얼굴로 떠나는 내 등 뒤로 나를 살게 하는 무기력이 지치지도 않고 따라 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