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본이라는 거울 (2)

못해요. 못해요. 아, 못해요. 원래 못해요.

by 이슬

사진 출처 Unsplash, eric-eastman



2. 겪어봐도 못 하는 대본


가만 보면 내 글은 기승전‘아빠’다. 아빠가 돌아가신 지 벌써 2년도 더 지났는데, 뭔가 쓰다 보면 자꾸 아빠가 걸린다. 툭, 툭 걸려서 글에 쏟아져 나온다. (지금도 쏟아지는 중이다.)


꿈을 꿨다. 내 방 안으로 UFO가 내려왔고, UFO 문이 열리면서 빛에 싸인 아빠가 나를 향해 다가왔다. 다행히도 아빤 예전보다 훨씬 건강해 보였고 표정도 밝아 보였다. 아빠는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봤고 나도 그런 아빠를 말없이 바라봤다. 아주 오랫동안. 그리곤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곤 말없이 뒤돌아섰다. 그 순간, 아빠를 잡지 못하면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단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난 아빠를 잡지 못했다. 아니, 지났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난 아빠를 보냈다. 마지막 인사와 함께. 아빠... 잘 가요. 안녕, 아빠.*


이 대본은 정말로 내가 쓴 것만 같았는데, 처음 받아들었을 때는 이상하리만치 너무 먼 남 얘기처럼 느껴졌다. ‘아, 왜 이렇게 궁상을 떠는 거야.’라고 까지. 무언가 알 수 없는 거부감이 가슴을 콱 막았다. 아마 더는 울고 싶지 않았던 것 같고, 슬프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슬픔 같은 건 그냥 어딘가에 묻어두기만 하고 싶었다. 아무도 그걸 건드리지 않았으면 했다. 나는 콱 막힌 가슴으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수업 시간에 내 차례가 돌아왔을 때, 나는 멀거니 서서 밋밋하고 감정 없는 태도로 그저 대본을 줄줄줄줄 읽고 말았다. 맙소사. 겪어보고도 못하는 대본이라니…! 이게… 이게 말이 되는 것인가 말이다. 심금을 울리는 연기를 해내고 다 같이 감동해서 통곡해도 모자랄 판에!


극혐 대본들과 마찬가지로 하루에 최소 세 번은 대본을 연기하고 녹음하는 숙제가 주어졌다. 성실한 사회인이 된 나는 학원의 최연장자라는 감투에 걸맞으려 꼭 세 번 이상은 연습을 했는데, 한 번 두 번 하다가 열 번, 스무 번 횟수가 쌓일수록 내 가슴 어딘가의 깊은 곳이 찔려 어느 날은 눈물보가 터지고 말았다. 아, 눈물을 흘리면서 연기했다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눈물을 흘려도 발연기일 수 있다는 걸 여러분은 아시는지? 그저 나는 이 대사를 몇 번을 곱씹다가 화자의 심정을 이해하고야 만 것이었다. 그 심정은 점점 더 선명해졌다. 나는 어느 날엔 눈물을 쉴 새 없이 줄줄 흘리며 “흐아아아… 이거 너무 슬픈 대본이잖아아아” 했고, 어느 날엔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힐 정도로 깜짝 놀라 “흐아아아 맙소사, 어떡해…”하며 새로운 단서를 발견하기도 했다. 이 사람이 아빠와 마지막 인사도 하지 못했었구나, 같은 것. 그건 내가 미처 슬퍼하지 못했던 내 것이기도 했다.


내 꿈에 아빠가 등장할 때, 아빠는 자주 먼 곳에 있는 존재로 나오곤 한다. 우주에 있거나, 하늘 위에 있어서 나에게 전파 같은 걸로 메시지를 보낼 수밖에 없다. 어느 날은 보라색과 분홍색이 섞인 반짝이는 종이 위에 아빠가 보낸 메시지가 지직지직, 쓰이다 말다, 쓰이다 말다 하는 꿈을 꾸기도 했다. 너무 멀어서 그런 것이다. 거기엔 내 이름만 지직, 지직. 나를 부르는 그 이름만 쓰이다 말다 쓰이다 말다 했다. 아주 애가 타도록. 그러니 나는 저 대본의 주인공이 왜 꿈에서 UFO를 보았는지 안다. 아빠가 UFO를 탈 만큼 아주 먼 곳에서부터, 자신을 보기 위해 왔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심정이 어땠을지도 알 것 같다. 아빠는 꼭 그런 존재… 그렇게 멀리서도 올 수만 있다면 오고야 마는. 애초에 마지막 같은 건 없었으면 좋았을 테지만, 결국 인사는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 대본은 해피엔딩이다.

그리고 우리 아빠도 올 수만 있다면 왔을 거다. 그러니 나쁜 엔딩은 아니다.



3. 그냥 못하는 대본


어이~ 야, 3896! (빈정거리며) 어이! 너 말이야 너, 사형수! 음주 뺑소니가 뭐냐? 쪽팔리게. 여자에 어린애까지 일가족을 싹 다 밀었다며? 차라리 우리처럼 딱 패고, 부수고, 죽이고... 어? 당당하고 깔끔하게, 쯧... 아니냐? (대답 없자) 새끼가 뭘 꼬라봐? 허! 말이 짧다? 뺑소니 칠 때 혀도 반토막났냐? (비웃으며) 하긴, 저렇게 뻔뻔하니 빨간 명찰까지 달았지... 꼬라지에 딱 어울리네 빨간 명찰. 에라이..카악-퉤! _ KBS 무대 <핑크색 매니큐어> 중**


‘제발 그러지 마. 지금 상황을 보니까 네가 주인공이 아니야아~ 지금 이 씬에서 주인공은 그 빨간 명찰이라고! 넌 좀! 가만히 좀 있어!’ 하는 이성이 나를 붙잡아 도저히 연기를 할 수 없었다… 는 건 뻥이다. 성우 공부를 시작한 이래 내가 계속해서 못하고 있는 건 깡패, 복싱 선수, 말괄량이, 사기꾼, 슈퍼모델, 갑질하는 소시오패스, 괄괄한 할머니, 개구쟁이… 주로 에너지를 바깥으로 뿜어내는 존재들. 나는 이런 대본을 받아들 때마다 ‘내가 아닌 것’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그리고 과연 내가 아닌 것이 되기란 가능한가? 궁금해진다. ‘연기’라는 것의 불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본다. 나는. 연기자들을. 격하게. 존경하게 되었다.


내가 아무리 터프하게 해보려고 해도, 우리 반 그 누구도 나에게 쫄지 않는다. 이럴 때마다 듣는 선생님의 말씀. “아니 아니, 그건 해준이고, 해준이 말고 얘를 연기해야지.” 아아아아아아…! 나는 그냥 자꾸 나다.


말을 얼버무리거나 흐릿하게 하지 못한다. 웅얼웅얼 대거나 이래도 상관없고 저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머릿속을 텅 비우지도 못한다. 뒷일 생각 안 하고 아무 말이나 막 던져 놓지도 못한다. 내가 하는 말은 주로 내 뇌의 주름을 따라 여기저기 돈 다음 입으로 나온다. 뇌를 거치지 않고 가슴에서 목구멍을 통해 바로 입으로 뱉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가슴을 쫙 펴고 허세를 부리는 건 왠지 창피하다. 높은 톤의 목소리로 다른 사람을 들러리 세우는 건 부끄럽다. 큰 소리로 떠들면서 우갹갹갹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건 힘들다. 에너지에 가득 차 하루 종일 눈을 반짝이고 긍정의 힘을 모아 “이건 이래서 설레구여~ 저건 저래서 설레구여~”도 힘이 달린다. 이게 나다. 응, 나다. 명확하다.


친구야! 잘살고 있니? 국회의원 생활은 어떻구? 응, 그래~ 얘, 그거 아니? 알고 보니 난 이렇게나 또렷한 사람이었어. 몰랐지? 괜찮아~ 나도 얼마 전에 알았어!


자, 그러면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그저 이 또렷한 나에 머물러 살기만 할 것인가? 아니, 아니. 그건 연기를 배운 자로서, 소설이 구원의 하나라는 걸 믿는 자로서 할 짓이 못되지. 성우학원에 다니면서 다시 생각하는 건, 내 안에 다른 면이 없다고 단정 짓지 말자는 것! 분명히 “어? 내가 이런 것도 되네?”하는 지점들이 생겨날 것이라고 믿는다. 내가 그토록 싫어하고, 그토록 갖고 싶지 않아 하는 면들도 내 안에 분명히 있으니까. 아주 조용하게 숨 쉬면서 찌그러져 있는 그것들을 살-살-펴서, 없는 애 취급하지 않고 꺼내 볼 날들이 올 것이다. 그러면 나라는 모양의 선은 둥글게 펼쳐졌다가, 쪼그라들기도 했다가, 점선이 되기도 했다가,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중앙선의 모양이 되기도 하며 변화할 것이다. 나는. 아주. 괴롭. 겠지. 하지만! 내가 저-위에 언급한 그 극혐해 마지않는 책의 저자가 그랬다. “어떤 고통을 지속할 수 있는가? 그것이! 당신을! 나아지게! 할 겁니다!” 개똥도 약에 쓴다더니, 아무래도 모든 것엔 쓸모가 있네. 그래, 이 발연기의 고통은 지속만 된다면 나를 나아지게 할 것이다.



나라는 사람의 모양


우리가 보통 얘기하는 ‘선을 긋는다’는 말은 꽤 냉정한 것처럼 들리지만 ‘나의 모양을 알린다’는 뜻이기도 하다는 얘기를 들었다. (저자가 직접 읽어주는 오디오북으로 읽은 책이니 들은 셈이다.) 별이 다섯 개의 선으로 이루어져 자신의 모양을 나타내듯이, 나라는 사람의 모양도 수많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선을 그어가며 만들어진다는, 그런 신선한 구절이었다.

내가 대본을 통해 만나는 사람들, 캐릭터들은 나의 선을 그어주고 있다. 늘 희미하고 애매하다고 느꼈던 나 자신. 가끔은 내가 그냥 아무 색깔도 맛도 없는 ‘물’같다고 느끼게 했던 시간들이 옅어지고 있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또렷하다. 그리고 그런 내가 좋다.






* 출처불명

** 2018.01.27방송. 극본 김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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