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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슬 Jun 21. 2023

재난대책본부

인간 폭탄에 대처하는 나의 자세

  중국 냉면을 사랑한다. 일터인 묘지에서 일하는 모두가 열광하기에 나도 한 번 시켜봤는데 투명한 국물에 살얼음이 살살살 올라간 것이 은은하게 달콤하고 차갑고. 거기에 면은 어찌나 쫄깃한지, 푸짐하게 올라간 야채들과 함께 먹으면 아삭과 쫄깃을 동시에 맛볼 수 있다. 잊지 말고 땅콩소스를 듬뿍 넣자~! 혀가 호롤롤로 녹아내리면서 만세~!를 부르고 여름은 지나간다. 나의 8월은 이렇게 갔다. 중국 냉면의 맛. 이게 내가 묘지로 출근하며 알게 된 것 첫 번째다. 


  두 번째는 공기 중 유해 물질 냄새의 유효기간이다. 내가 처음 면접을 보러왔을 때만 해도 코를 통해 들어와 뇌를 찌르던 신축 사무실의 유해 물질 냄새가 3주가 지나니 90% 이상 빠져 미미해졌다. 냄새로 느껴지지 않는 유해 물질이야 일정 기간 계속 나오겠지만, 중요한 건 시공한 지 1년 넘은 우리 집 방음부스에서는 여전히 기준 수치 이상의 유해물질과 골때리는 냄새가 나오고 있다는 것. 독자 여러분? ‘골때린다’는 말이 관용어구일 거라고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실제로 골을 두들겨 패니까요~! 난 이 미친놈의 방이 정상이 아닌 줄은 알았지만 진짜 정상이 아니었단 걸 묘지에서 확신하게 된 것이다. 시공업자를 다른 의미에서 내 일터로 데려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으나 그건 이 글에서 쓸 내용이 아니니 일단 접어두기로 한다. 


  어떤 일은 그냥 재난처럼 온다. 징후도 없이. 징후가 있었더라도 전부 일이 터지고 나서야 보이는 거라 제때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리고 사람은 믿고 싶은 쪽으로 나아간다. 내가 ‘이 지독한 냄새도 곧 빠지겠지’라고 믿으며 참아 온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내가 최근에 후려맞은 이 포름알데히드 재난은, 벌에 쏘인 것처럼 온몸을 붓게 만들고 (두피부터 발끝까지 핫-이-슈) 나는 벌써 5개월째, 그리고 앞으로 최소 6개월을 항히스타민제와 함께 살아가게 됐다. 방음 시공 업체 대표는 말했다. 친환경 자재를 썼으니 그럴 리가 없고, 너희 집이 이상한 것이며, 네 몸 약한 것을 왜 나한테 뭐라고 하느냐고. 그럴 리 없는 일이 왜 벌어진 것인지는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었는데 자기가 대신 했다. 이렇게 몇 차례, 그의 해망쩍은 뇌 기능을 마주하자 내게 놀라울 만큼의 평정심이 찾아왔다. “아, 그냥 더 이상 말씀을 마세요.” 대화를 끝냈다. 솔직히 그가 자꾸 자기의 바닥을 보여주는 게 좀 부담스러웠다. 


  가만히 앉아 생각하건대, 나는 차라리 좀비를 만나고 싶다. 저기 저 창밖으로 보이는 묘지에서 죽었던 사람들이 흙 털고 일어난 다음에 비척비척 걸어 이 사무실로 들어와서 내 목을 물어뜯으면 “아 씨-바!” 하면서, 그래도 속은 시원하게 죽을 것 같다. “야, 나 좀비 물려 죽었잖아. 이건 진짜 말도 안 되는 일이었어. 뭐 어쩔 수가 없는 거야 죽는 수밖에~!” 속이 시원한 죽음이다. 이와 반대로 사람을 미치게 하는 건, 속엔 뭐가 들었는지 모르겠으나 일단 인두겁을 쓴 자들이 하는 짓이다. 게다가 이들을 통해 내 앞에 당도한 재난은 재난 한 번으로 끝나지도 않고 부수적 피해들을 양산한다. 남이 유발한 피부병으로 아픈 것도 열이 받는데 “네 몸이 예민한 거 아니냐?” 같은… 하지 않는 게 더 좋았을 말들…을 할 거면 입 가지지 마…. 방음업체 대표는 모르는 것 같다. 쿠키 한 조각을 구워 팔아도 너처럼은 안 한다는 걸….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기능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사회가 원활하게 돌아가려면 위치 파악의 기능이 핵심이라고 본다. 사람이 자기 위치 파악이 안 되면 재앙이 된다. 존재 자체가 사회적 폭탄이자 재앙인 상태가 된다고. 예를 들면, 물이 새는 집을 판 부동산 업자가 “비 오면 다 샙니다! 저희 집도 샙니다!”라고 했던 것, 자기와 다른 의견을 가진 입주민에게 “너만 바뀌면 되는데 왜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하느냐!”고 하던 동대표, “미안하다고 했는데 왜 안 받아줘!”라고 분노를 터뜨리는 우리 시대의 수많은 전 남친들(이면 다행인데…), 그리고 “네 몸이 약한 걸 왜 나한테 뭐라고 하냐”는 방음업체 대표…. 이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위치가 파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관계와 상황 속에서 자신이 어떤 포지션인지 알지 못하는 이 재앙들은 무슨 인풋을 넣든 간에 “내 기분이 나빠졌다”, “내 기분이 상한다”라는 공통적인 아웃풋을 내놓기도 한다. 그러면 사건은 진전되지 못한다. 갑자기 재난을 당한 쪽에서 재난 유발자를 위로해야 하고 사과해야 하는 상황으로 빠져버린다. 이거 뭘까? 진짜 패턴이 다 똑같아서 연구 논문이라도 발표하고 싶다. 


  수많은 위로들이 말했다. “네 탓이 아니야.” 맞다. 내 탓이 아니다. 그렇다면 누구누구 때문인데, 이 마음이 괴로운 것이다. 내 인생인데, 내 인생에 감히 누군가 끼어들어 좌지우지하는 것 같은 불쾌감. 누구누구 때문이기 때문에 그의 대응이 나의 다음 스텝에 중요한 부분이 되어버리는 것. 그런데 보통 책임은 재난을 마주한 내가 지게 되니, 이런 일들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서 풀리지 않는 매듭이 된다. 남의 이름이 적힌 매듭 따위! 내 마음에 보관도 해주고 싶지 않지만, 꼬이고 꼬인 매듭을 남의 마음에 버려두고 가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세상은 그닥 정의롭지 않지만, 네가 만들어 뿌리고 다니는 매듭들이 네 발을 옭아매는 날이 올 거라고. 그건 내 인생이 그런 것과 마찬가지라고. 내가 때때로 인과응보의 법칙에 따라 넘어지고 우는 것처럼, 의외로 공평한 세상에서 너도 네 매듭에 걸려 넘어지는 날이 온다고. 


  내가 어른이 되었기 때문에 재난의 스케일이 더 커진 걸까? 아니, 천박한 어른들을 무방비로 마주해야 했던 어린 시절이 상처는 더 컸을까? 금전적인 손해는 스케일이 커졌더라도 상처의 크기는 별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여지껏 살아와서는, 이런 인간 재앙들을 보고 아직 놀랄 마음이 남아 있는 내가 대견하다. 그리고 내 안의 재난대책본부가 조금씩 노련해지고 있는 것도. 나는 놀라고 실망하는 데 쓰는 에너지를 최소화하고 있다. 대처가 냉정해졌다. 상대의 사정을 먼저 헤아려 이해하거나 양해하지 않는다. 상대가 그것을 요청하고 부탁할 때만, 응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내가 결정한다는 방침이다. 


  이쯤에서 그동안 쌓아 올린 재난 대응 매뉴얼의 일부를 공유하겠습니다~❤️  

1. 쌔한 순간부터 증거를 모은다. 여러분, 여기서 쌔한 상대에는 가족과 애인도 포함이라는 게 핵심입니다.

2. 중요한 계약 앞뒤로 나눈 문자/통화내역은 지우지 않는다. 서류, 버리지 않는다.

3. 지인 소개니 뭐니 해도 계약은 계약이므로 계약서는 꼭 쓴다.

4. 통화 녹음기능을 적절히 활용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둔다. 앱이든 뭐든 항상.

5. 기가 막힌 일을 겪었다면, 내가 지금 이 사건에서 원하는 바를 명확히 한다. 분노는 내면이 정리되지 않아 구체적이지 않을 때 뭉뚱그려진 위력이 더 크다. 원하는 것을 명확히 하고 나면 의외로 침착해진다.

6. 대부분의 일들에서 내가 원하는 바는 내가 나를 지켜냈다는 감각인 것 같다. 내 존엄함을 내가 지켰다는 감각. 나를 무너뜨리는 게 내가 되지 않도록 내 존엄함을 1순위로 한다. 여기에는 ‘빨리 용서하지 않는 것’도 포함된다. 용서는 빠를수록 억울해지기 쉽다.

7. 당장 달려가서 법보다 주먹으로 해결하고 싶은 마음을 다스린다. 주먹 날리는 순간 상황은 더 꼬인다. 많은 경우 법은 네 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할 수 있다면 어떨까…? 매뉴얼을 수정할 의향이 있으니 이런 방법을 알고 있으면 연락 주

8.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재해 입은 나의 마음에 충분히 공감하는 것. 지금 어떤 마음이 드는지 묻고, 어떤 사실 때문에 가장 마음이 상했는지 묻고, 얘기를 들어주기. 그리고 어떻게 해야 고통에서 벗어나 다시 삶을 살 수 있을지 대안을 찾아보기. 내가 나와 함께.

9. 항상, 늘, 매번이라는 단어의 늪에 나를 빠뜨리지 않는다. 행복은 잔잔하고 큰 꼬임 없이 등장해서 행복이고, 불행은 엉킨 실타래라 존재감이 클 수밖에 없다. 어떤 날은 중국냉면을 먹고 하루 종일 행복하고, 또 어떤 날은 등처먹히는 이상한 날인 것뿐이다.


  혹시 재난 같은 일 앞에서 눈물 훔치고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이건 너라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언제 누구한테 벌어지느냐 했던 일일 뿐이야.” 아무도 원치 않지만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 손이 덜덜 떨리는 일들 앞에서 내 친구가 몇 번이고 해준 말. 몇 번이고 나를 부축해 준 말. 세상살이가 좀, 그렇다. 조금 지나면 어떤 면에서는 무던해지기도 한다. 성장이고 뭐고 솔직히 이딴 일들은 안 겪고 안 성장하는 게 백배 나은 것 같긴 한데, 어차피 벌어진 일이라면 그것이 내 안에서 나만의 매뉴얼이 된다는 것만 기억하자. 그리고 곧 응용 재난에도 대응이 될 것이다. 그때도 손은 파르르 떨릴 수 있지만 “나 인간 포름알데히드 흡입기야 왜 이래~!” 하는 마음으로 머금었던 독을 방출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휴, 어른으로 사는 거 왜 이렇게 피곤할까. 그래도 이렇게 하나하나 대처하며 살아가다 보면 의도치 않게 유능한 어른이 될지도 모르니까 일단 살아보기로 한다. 


  기억하자. 이런 일은 삶에 항상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그냥 이번이 좀 그랬던 것뿐이다. 살다 보면 다시 여름이 오고 중국집에선 중국 냉면을 개시하고 나는… 중국 냉면을 사랑한다. 일터인 묘지에서 일하는 모두가 열광하기에 나도 한 번 시켜봤는데 투명한 국물에 살얼음이 살살살 올라간 것이 은은하게 달콤하고 차갑고. 거기에 면은 어찌나 쫄깃한지, 푸짐하게 올라간 야채들과 함께 먹으면 아삭과 쫄깃을 동시에 맛볼 수 있다. 잊지 말고 땅콩소스를 듬뿍 넣자~! 혀가 호롤롤로 녹아내리면서 만세~!를 부르고 여름은 지나간다. 나의 8월은 이렇게 갔다. 중국 냉면의 맛. 이게 내가 묘지로 출근하며 알게 된 것 첫 번째다……   





20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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