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 페인'을 봤던 올해 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할머니에 관한 영화라는 걸 모르고 영화관에 갔었는데 눈물을 참기가 힘들었다. 그 후로 할머니 생각을 자주 했다. 영화에서 사촌 지간인 벤지와 데이빗은 홀로코스트 피해자였던 할머니의 고향인 폴란드를 방문해 할머니가 겪었던 역사적 고통에 대해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자 한다. 벤지는 떠돌이 같은 신세에 심한 불안과 우울 등 정신적 문제를 겪고 있는 반면 데이빗은 상대적으로 더 안정적이고, 결혼도 했고, 아이도 있고, 어려움이 있을 때 티를 내지 않으려는 타입이다. 주제에 비해 완전히 무겁지는 않아서 상반된 캐릭터가 합을 맞추는 코미디이기도 하고 폴란드로 여행을 가는 로드무비이기도 하지만, 내게는 그냥 자꾸 할머니가 생각나는 영화였다. 벤지와 데이빗은 황폐한 수용소의 흔적을 보면서 생각한다. 할머니가 겪었던 일에 비해 지금 우리 세대의 고통이란 너무도 사소한 것 아닐까. 이게 정말 ‘리얼 페인’일까.
우리 할머니가 홀로코스트 같은 사건을 겪으신 건 아니지만, 한국에서 1920년대에 태어난 여성이고, 광주 사람이란 사실만으로... 종종 들었던 얘기로 미루어보아 어려운 날들이었을 거라고 짐작한다. 우리는 지나치게 유약하고 할머니는 지나치게 잔인했던 시대를 대범하게 살아갔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할머니는 100년이라는 시간을 살았다. 우리는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건지 갈피도 못 잡는데 할머니는 그냥 살았다. 의연하게 살아냈다. 그 사이 수많은 독재자들은 떠났고 야만의 시대는 끝났다. 세상은 분명 더 나아진 거 같은데 우리는 왜 여전히 아픈지. 데이빗도, 벤지도, 나도 알 수가 없다. 우리 세대의 고통이란 할머니가 겪었던 것과 분리해서 떼어낼 수 있는 걸까. 그게 이 영화가 내게 던지는 질문이었다. 아무 말 없이 수용소를 물끄러미 보는 벤지와 데이빗의 얼굴을 보며 나는 100년이란 시간을 떠올려봤다. 그 시간이 마냥 고통이었을 거라고 쉽게 상상하는 것도 나의 오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벤지와 데이빗이 찾아간 할머니의 예전 주소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유럽에 와서 공부하고 머물게 되면서 나름대로 이민자의 삶을 살고 있는데, 가끔 여기서 우울하거나 정신적으로 약해진다고 느낄 때마다, 상대적으로 할머니와 엄마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겪은 어려움에 비하면 나는 혜택 받은 것 아닌가? 내가 앓는 고통이 조금 사치스러운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곤 한다. 할머니와 엄마가 가지지 못했던 기회를 가졌다는 부채감과 그래서 더 잘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 또 한편으로는 그런 슬픔을 조금은 외면하고 싶은 마음 등 복잡한 감정을 알고 있기에 영화를 공감하면서 보았다. 데이빗처럼 사람들 다 그렇게 살지 않나 생각할 때가 있었다. 꼭 그렇게 나 아파요 하고 온갖 티를 내야 되나, 다 약 먹으면서 버티고, 그 정도의 문제는 스스로 해결하면 되는 거 아닌가? 하면서. 하지만 남의 문제에 온갖 오지랖은 다 부리고 자기감정을 꼭 분출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벤지를 보면서, 그럼에도 벤지를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남에게 자기 고통을 드러내는 게 꼭 민폐는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경우 나는 신경쇠약 데이빗처럼 혼자 삼키는 데에 익숙한 사람이었고, 벤지 같은 사람을 쉽게 좋아할 수도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수용소를 방문한 후 눈물을 쏟아내고, 이제 막 만난 사람을 보며 저 사람 눈에는 슬픔이 가득하다며 혼자 두면 안 된다고 하는 벤지에게 마음이 쓰였다. 그 고통이 엄살이든, 남을 불편하게 하든, ‘진짜 고통’이 아니든, 세상에는 생각보다 그 얘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 많다고 여전히 믿기 때문에.
한국의 지난한 역사라든지 그와 관련한 할머니 이야기라든지 그런 걸 유럽 친구들에게 얘기할 때면 내가 괜한 얘기를 했나? 다 지나간 과거일 뿐인데 내가 과도하게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나? 라고 지레 걱정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대부분 다 경청해 주었고, 여기에서 친해진 친구들 중엔 부모님이 이민자 출신인 친구들이 워낙 많아서 오히려 공감대를 형성할 수도 있었다. 결국은 내가 직접 겪은 고통이 아니더라도, 이런 이야기를 계속할 필요가 있는 건 그게 떠나간 사람을 기리는 일이기 때문 아닐까.
할머니와 그 삶, 또 할머니와 나의 관계를 자주 생각하느라 이 영화를 더 개인적으로 볼 수 밖에 없었다. 벤지도, 데이빗도 각자의 방식으로 할머니를 떠나보냈듯이 이 영화를 보고 할머니를 생각하며 글을 쓰는 게 내 나름의 추모 방식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