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글씨로 기억된 시간
그날은 왠지 모르게
꽉 찬 공간을 비우고 싶던 날이었다.
이곳저곳 물건들을 들쳐보다 오래된 서랍장 안에서 우연히 작은 박스 하나를 발견했다.
전혀 기억에 없던 박스 뚜껑을 여는 찰나에도
그 안에 있을 그 어떤 것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조용히 숨 쉬고 있는 종이 조각들과 마주쳤다.
빛바랜 봉투들, 노란 엽서들,
그리고 그 위에 누군가의 손끝이 남긴 삐뚤빼뚤한 글씨 체도 작고 귀여운 그림은 덤 켈리그라피처럼 모양낸 글씨까지. 서랍 안쪽 깊숙이, 한때는 꼭 간직하고 싶어 끼워 넣었던 편지와, 낡은 엽서까지 빛바랜 봉투 속에서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30년은 족히 된 것들이었다.
사춘기의 어설프고 풋풋했던 말투,
친구들이 건넸던 따뜻한 위로, 처음 받아본 고백 편지의 떨리는 문장들 한 장, 두 장 꺼내어 읽다 보니
그 시절의 내 얼굴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손글씨는 그 사람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기울어진 획 하나, 서툰 맞춤법 하나에도
마음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기억 속의 친구가 “힘내라”는 단어들 동그란 글씨에 담아 건네던 날, 그 말이 내게 우산이 되어준 걸 나무 그늘이 되어준걸 그 넓고 시원한 바람이었던걸 그제야 다시 깨달았다.
끝내 말로는 전해지지 않았지만, 그 마음은 잉크처럼 스며들어 지금도 내 안에서 마르지 않는다. 는 걸
그때는 몰랐다.
켜켜이 쌓인 이름들. 어설프게 접힌 편지 한 장은 처음 받아본 고백이었다.‘좋아해’ 라말은 한 번도 없었지만, 글 속 따뜻함과 나에 대한 마음이 느껴질 만큼 진심이 느껴졌다. 떨려서인지, 혹은 용기 내어 썼기 때문인지 글자들이 자꾸만 비뚤어져 있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종종 마음이 너무 커서
말로 다 담지 못할 때 종이에 기대곤 했다.
손글씨는 그 사람의 체온이었다.
글자 사이에 숨은 쉼표는 그날의 망설임,
문장 끝의 마침표는 그날의 결심. 펜으로 눌러쓴 단어들은 그 어떤 디지털 폰트보다
진심에 가까웠다.
종이는 오래 침묵할 줄 안다. 그래서 잊힌 줄만 알았던 감정들도 그 안에서 조용히 발효됐다. 시간이 지난 후에야, 진짜 향기를 낸다. 쫀득한 캐러멜향처럼
갑자기 누군가에 에 편지를 쓰고 싶어졌다
주변을 정리하려다 청소하려는 마음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책상 의자에 툭 내 몸을 걸쳤다
나는 여전히, 새 종이 위에 펜을 얹을 때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두근거리려서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글자들을 소심하게 쓰게 된다. 어쩌면 다시 누군가와 마주 앉게 될 어떤 날을 상상하면서
나는 종이 위에 서툰 마음을 눌러 적는다.
편지는 내게 지나간 시간이 아니라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작은 문이었나 보다.
디지털은 참 편리하지만,
시간을 통째로 꺼내어 보여주진 않는다.
하지만 종이 한 장, 펜 끝으로 남겨진 글씨는
그때의 공기와 마음, 눈빛까지도 되살려준다.
그 편지들을 다 읽고 나니 이따금 글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근사한 일인지, 그리고 내가 여전히 종이와 펜을 좋아하는 이유가 조금 더 선명해졌다.
어쩌면 우리는, 잊지 않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다시 만나기 위해 쓰는 건지도 모르겠다.
잊힌 줄 알았던 어떤 마음과, 오래도록 서랍 한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손글씨처럼. 비우려 했던 마음은
다시 차곡차곡 쌓여만 갔다.
흰 종이 위에 어느새 깨알 같은 그리움이 뒹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