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희동 러너

어설퍼도 걷고. 달리다. 숨쉬기.

by 스틸앨리스

처음엔 걷기였다.

바람은 이미 차가웠고, 개천 물소리가 생각보다 또렷했다. 여름이 엊그제 같은데 가을바람에 겨울냄새를 미리 맡는 것처럼 날카로운 질감이 코끝에서 느껴졌다


산책로 옆 갈대밭에서는 새 한 마리가 휙 날아오르며 내 옆을 스쳐갔다.


그 순간, 나는 한 장의 사진 속에 들어간 것처럼 세상이 느리게 움직여서 파인더로 사진 찍듯


눈으로 담아보았다.


바람이 내 뺨을 때리고, 머리카락이 얼굴에 붙었는데도 싫지 않았고 오히려 ‘살아 있다’는 느낌이 확실히 들어서 새롭고 좋았다.



조금 뛰기 시작하자, 다리가 무겁게 항의했다.


“이게 무슨 짓이야, 너 이렇게 오래 쉬었잖아.”


그 소리를 무시하며 더디게 달렸다.


그러다 개 한 마리가 내 옆을 따라 뛰기 시작했는데, 그 녀석의 혀가 나풀거리며 나를 놀리듯 웃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장면도 상상도 어찌나 기가차던지, 나도 모르게 뛰면서. 웃음이 터져버렸다



돌아오는 길, 숨이 턱에 차오르고 다리는 떨렸지만 마음은 이상하게 가벼웠다.


몸은 분명 힘든데, 머릿속은 맑았다.


이게 아마도 달리기가 주는 마법인 건가?


몸이 움직이면 생각이 단순해진다.


단순해지면 마음이 가벼워진다.


그 단순함이 삶을 견디게 한다.



달리기 시작한 이유도, 계속 달리는 이유도 거창하지 않다. 바람이 솔직하게 내게 말을 걸어오니까. “괜찮아, 어제보다 한 걸음이라도 더 가면 돼.” 대답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다시, 나의 하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달리기는 어쩌면 인생의 연습일지도 모른다.


넘어지지 않으려 애쓰기보다,


넘어져도 다시 리듬을 찾는 연습.


잠시 숨을 고르며 나를 다독이는 시간.



달려온 길 뒤로는, 새벽의 냄새와 바람, 그리고 웃음 한 줄기가 따라온다.


나는 오늘도 개천길을 달린다.


어제보다 단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가기 위해,


그리고 살아 있다는 이 단순한 기쁨을 잊지 않기 위해.


“달리기는 나 자신과 화해하는 일이다.”


책 속 연희가 말을 건넸을 때, 나는 페이지를 덮고 한참 동안 숨을 고르듯 멈춰 있었다.



그녀가 달리기 시작한 이유는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잃어버린 자신을 다시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 문장이 내 안에 닿았을 때, 오래 전의 내가 떠올랐다. 늘 바쁘다는 이유로 뒤로 미뤄둔 일들, ‘언젠가 하겠지’라며 미뤄왔던 시도들. 연희의 러닝은 단지 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삶을 다시 살아내려는 리듬의 회복이었다.



몸이 다시 기억하기 시작한 시간



더위가 한풀 꺾인 요즘, 개천을 따라 천천히 뛰다 보면, 공방일로 굳어 있던 근육이 하나둘 깨어난다. 묵직했던 마음도 조금씩 풀린다.


달리기는 단순한 운동이 아니었다.


삶의 리듬을 되찾는, 나와의 화해이기도 했다.



바느질하느라 굳어 있던 근육이 서서히 풀리고, 차가웠던 마음이 온기를 되찾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달리기는 결국 ‘움직이는 명상’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리듬 속에서, 나는 다시 내 몸과 마음이 살아 있음을 느꼈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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