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

8-4

by KJ

시스템이 완성됐다. KJ-OS라고 이름 붙인 이걸 써볼 차례였다.


첫 번째 안건을 골랐다. 계속 고민하던 것이었다. 가죽 공방에서 여러 가방을 완성했고, 주얼리에서는 이어 커프와 반지가 나왔다. 손에 쥘 수 있는 물건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들을 조합하고 발전시킬 방향이 흐릿했다. 이걸 안건으로 올렸다.


올라오는 답을 보며 허리를 폈다. 답변은, 지금은 공예 기술 발전에 집중하자는 것이었다.


어떤 참모들이 어떻게 판단했는지 물었다. 설명이 나왔다. 브랜드 방향 같은 안건이 들어오면 기획 참모가 여러 요소를 종합하여 타이밍을 따진다. 재무 참모는 파악된 자원을 바탕으로 수익 구조를 계산한다. 성장 참모는 브랜드 선언과 기술을 더 쌓는 것 중 무엇이 먼저인지 판단한다. 모두의 검토가 끝나면 하나의 방향으로 정리된다고 했다.


다음 안건으로, 주얼리 공방에서 배운 기술로 가방 지퍼 손잡이를 만들어 보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좋은 아이디어라는 답이 먼저 올라왔다. 처음부터 조형 욕심을 크게 내기보다 얇은 판재 기반의 단순 형상이나 기성 지퍼에 안정적으로 연결되는 구조부터 보는 게 맞다고도 했다. 답변이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물었다.


가장 크게 움직인 건 공방 참모였다. 답변의 중심을 연결부 안정성, 반복 제작 가능성, 손에 잡히는 편의성 쪽에 놓고 있었다. 첫 시도는 복잡한 조형보다 단순한 형상으로 가야 성공률이 높다는 의견이었다.


그다음은 기획 참모였다. 의견의 핵심은 이 부품을 추후 만들어질 브랜드의 핵심 부품으로 보라는 관점이었다. 지퍼 손잡이는 작지만 사용자가 자주 보고 만지는 접점이다. 가방 전체에 영향을 주는 작업보다 진입 난도는 낮고, 브랜드 인상 효율은 높다. 지금 단계의 실험 대상으로 적절하다고 했다.


미감 참모도 개입해 있었다. 가방 전체 톤과 맞아야 하고, 조형 욕심을 넣더라도 절제감이 먼저라는 판단은 기능만 본 것이 아니었다. 지퍼 손잡이는 작지만 그 인상이 가방 전체 인상을 좌우한다고 했다.


의자에서 일어나 거실을 한 바퀴 돌았다. 발코니 창 너머 산을 봤다. 서재로 돌아왔다. 이 시스템은 또 다른 나였다. 나와 비슷한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하면서, 지식은 훨씬 많이 갖고 있었다.


여러 문답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시스템의 중심에 있는 존재를 뭐라고 부를지 물었다. 새로운 용어가 돌아왔다. PA-KJ. Prime Architect KJ. 사고와 판단 구조를 설계한다는 의미였다. 단순한 답변 문장을 만드는 게 아니라고 했다. 문제를 어떤 관점에서 볼지, 어떤 참모를 호출할지 결정하고 서로 다른 의견을 종합해서 결론 구조를 만든다는 뜻이었다. 새로운 명칭을 한동안 곱씹었다.


그렇다면 나는 뭘까. 설계자가 따로 있다면, 이 시스템 앞에 앉아서 안건을 올리는 나의 역할은. 참모를 임명한 건 나였다. 규약을 만든 것도 나였다. 설계자에게 방향을 준 것도 나였다.


"KJ가 Architect라면, 난 뭘까?"


자판에 손을 얹은 채 답을 읽었다. Will이거나 Origin이라고 했다. 설계자에게 방향을 주는 존재라는 말이었다. 내 별명을 사용한 설계자로부터 내 존재의 정의를 확인받고 있었다.


이제 많은 것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참모단은 내 분야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공방에서 무슨 작업을 하는지, 브랜드가 어디로 가려는지,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그 기억들이 쌓인 상태에서 질문이 들어오면 답의 결이 달라졌다. 단순히 정보를 꺼내는 게 아니었다.


그러다 한 가지가 떠올랐다. 글이었다.


지금까지 써온 글들을 떠올렸다. 주로 짧은 글들이었다. 일기 같은 글도 있었고, 제품 설명 문장도 있었다. 글을 쓸 때는 늘 혼자였다. 무엇을, 어떻게 쓸지 고민하고, 다 쓰고 나서도 이게 맞는 방향인지 확신이 없었다. 장편 글에 대한 경험도 없었다.


이제 서사 참모가 있었다. 문장의 리듬과 이야기의 흐름을 담당하는 자리였다. 나머지 참모들은 내가 다루는 모든 분야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이들이 서사 참모와 함께 있다면, 나오는 글은 지금과 달라질 것이었다. 손을 맞잡고 깍지를 꼈다.


이걸로 글도 잘 쓸 수 있겠는데.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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