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공식은 없다

포스트모더니즘과 디자인

by stilllife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라는 말처럼 흔히 쓰이면서도 이렇다 할 정의를 내리기 어려운 말도 없을 것이다. ‘포스트’라는 접두어에서 알 수 있듯,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 이후의, 대신의, 혹은 거부하는 의미로 사용되는 한 편, 모더니즘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드러내기도 한다.


모더니즘이 계몽주의를 기초로 이성과 과학이 바탕이 된 일률적이며 이상적인 가치를 제시하며 더 나은 세상을 지향하는 특징을 보였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적 가치를 부정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며 세상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인정한다는 점에서 모더니즘과 대립한다.


이러한 가치관의 변화는 그래픽 디자인에서도 쉽게 목격할 수 있었는데 권위적인 기준을 토대로 절대적인 미를 추구하는 모더니즘에 반발하여 정규 교육을 받지 않고도 대중의 호응을 얻는 디자이너들이 출몰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디자인은 포스트모더니즘과 발맞추어 도덕적인 또는 기능적인 정당성을 부여할 필요 없이 많은 사람들의 욕구를 반영하는 매력적인 매개체이자 일명 정통 디자인파에게 던지는 도전장이기도 했다.


아름다움과 기능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이고, 가볍고, 보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이미지가 의도적으로 생산되었다. 또한 독창적인 창작품에 대한 강박적 가치와 대치되는 패러디, 혼성 모방, 기존 작품을 아이러니하게 재사용하는 등의 관례도 쉽게 볼 수 있었는데, 언론매체의 상징인 신문의 헤드라인을 잘라서 여왕의 몸값을 요구하는 편지를 디자인하여 기득권층을 우롱하는가 하면, 아무렇게나 그려놓은 듯한 얼굴 그림과 낙서하듯 쓴 글씨로 투박함을 과시하듯 디자인한 펑크 음악의 콘서트 포스터 등, 주류 디자이너의 공식을 탈피하여 여러 계층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초기 포스트모더니즘 디자인의 특징이었다.

제이미 레이드 (Jamie Reid), 섹스피스톨즈의 ‘갇 세이브 더 퀸’ 앨범자켓, God Save the Queen by the Sex Pistols, 7-inch single
클리프 로맨 (Cliff Roman) The Weirdos are Loose, 콘서트 포스터 1977

다소 혼잡하지만 흥미진진하고 다양한 이미지가 풍부했던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는 아직 유효할까? 이미 1990년부터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종말이 언급되었지만, 포스트모더니즘 현상이 대세가 된 지 20여 년이 지난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가 통용되었듯, 한 시대를 규정짓는 이름은 그 시대를 돌아볼 수 있을 때 합의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용어의 합의 이전에 현상에 대한 공감대 형성이 우선일 터, 이상적인 가치의 실종으로 사회가 나아갈 방향성과 통합적 기능이 상실되었던 포스트모더니즘의 한계에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사상이 무엇일지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그것을 대표하는 이미지는 무엇일지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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