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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리 Mar 22. 2022

혼돈이라는 또 하나의 질서

사서 한 책읽기 #005 -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by 룰루 밀러

내 인생에서 치열하게 무언가를 해 본 적이 있던가라고 생각해보면 없다. 때론 필요에 의해서 혹은 단순히 하고 싶은 일이어서 몰두하기도 하지만 어떤 것을 간절히 원하거나, 그것을 위해서 매달렸던 적도 없었던 것 같다. 누군가를 열렬히 좋아해서 덕질을 했던 적도 당연히 없다. 나는 적당히’라는 말을 좋아한다. 어떤 것에 깊이 빠지려 하면, 어김없이 ‘굳이…’라는 말이 마음속에 피어오르는, 어떤 것에도 깊이 빠지는 못하는 ‘적당한’ 인간, 그게 나였다. 그래서인지 나와 다른 열정적인 사람들을 보면 궁금했다. 그들은 무엇을 위해 치열할 정도로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 건지, 어떤 원동력이 그들을 지치지 않고 움직이게 만드는 건지 궁금했다. 이런 이유로 룰루 밀러와 같은 마음이 되어 데이비스 스타 조던을 쫓아 책을 읽어갔다.

사실 기대했던 것만큼의 대단한 반전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엄청난 반전이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지 않았지만. 기대하지 않았던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반전이 아니라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명제에 닿는 과정까지가 조금은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나에게 이 책이 내 마음속 깊숙이 훅 치고 들어왔던 부분은 데이비드가 우생학을 열렬히 지지했던 과학자였다는 사실과 그 이후의 이야기였다. 그 부분이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도 나를 오래도록 생각하게 했다. 그 이야기에 대해 더 말하고 싶다.

룰루 밀러는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주변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알린다. 그 사실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별로 달라질 게 없다는 반응에서부터 쉽게 납득하기 어려워하는 사람,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는 사람까지. 나라면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이 책을 절반만 읽은 나라면 이렇게 대답했을 것 같다.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렇게 중요할까?

그게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도 아닌데, 그냥 어류라고 편하게 알고 부르는 게 뭐 그렇게 나쁠까?

하지만 이 책을 끝까지 읽고 난 후 이 명제는 단지 물고기가 존재한다, 안 하다의 문제로 끝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가 어류라고 지칭하는 것들이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직관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 ‘직관’이라는 것만 믿고 눈에 보이는 것만 쫓았을 때 일어나는 일이 바로 ‘부적합자’를 만들고, 개개인의 특별하고 소중한 인격을 존중하지 않는 우생학을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쉽게 대답할 수가 없다. 세상에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이 단지 이것 하나뿐일까.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말을 쉽게 한다. 대개 그런 말들은 감정에 호소하거나, 정서적으로 납득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을 통해 그 말의 의미를 과학적으로 접근하고 설득당할 수 있다는 것이 참 새롭다.

사실 이 책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아닌 다윈을 위한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룰루 밀러가 맹목적으로 물고기를 쫓았던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아니라, 다양성에 대해 찬양하는, 혼돈을 아름답다 지칭했던 다윈을 자신이 공부해야 할 목표로 정했다면 길고 긴 터널 같은 시간을 보내지 않고 아름답게 포기하는 방법을, 포기가 아니라 인정하고 수용하는 방법을 배우지 않았을까.

혼돈을 인정하는 것은 포기가 아니다. 포기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지만, 인정 와 수용은 더 많은 것을 끌어안을 수 있다. 어떻게든 곱슬머리 남자와의 관계를 되돌릴 수 있다는 자기 오만을 인정하고, 자신을 보호해줄 사람으로 눈에 보이는 남성성이라는 자신의 눈을 가리고 있던 직관을 버리고 ‘라벤더처럼, 루비처럼, 설탕처럼, 수업을 빼먹으려고 둘러대는 거짓말처럼’ 자신을 웃게 하는 감정을 따랐을 때 비로소 행복을 찾은 룰루 밀러처럼.


“왜냐하면 별들을 포기하면 우주를 얻게 되니까”


​p.248

“그런데 물고기를 포기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나는 전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물고기의 반대편에 다른 뭔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 물고기를 놓아주는 일은 그 결과로 또 다른 어떤 실존적 변화를 불러온다는 것. 그리고 그 결과는 사람에 따라 다 다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별들의 경우에 꼭 그랬던 것처럼.


p.250

우리는 전에도 틀렸고, 앞으로도 틀리리라는 것. 진보로 나아가는 진정한 길은 확실성이 아니라 회의로, “수정 가능성이 열려있는”회의로 닦인다는 것.


p.263

내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 나는, 마침내, 내가 줄곧 찾고 있었던 것을 얻었다. 하나의 주문과 하나의 속임수, 바로 희망에 대한 처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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